나에게만 보이는 바카라상

도서관 창문 Ⅱ-1 by 마거릿 올리펀트

by마봉

6월의 어느 밤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지 한참 되었고, 만약 겨울이었다면 하인들은 이미 문단속을 하고 고모는 이층 방으로 올라갈 준비를 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밖은 여전히 환한 대낮 같았다. 태양은 이미 저문 지 오래라 붉은 노을조차 사라졌지만, 모든 사물이 진주 빛깔의 중립적인 색채로 잦아든 그런 빛, 낮이긴 하지만 낮은 아닌 그런 묘한 빛이 감도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식사 후 정원을 한 바퀴 돌고 나서 각자의 ‘일상적인 소일거리’로 돌아왔다. 고모는 바카라을 읽고 계셨다. 잉글랜드에서 우편물이 도착했고*, 고모는 가장 큰 즐거움인 ‘더 타임스(The Times)’지를 손에 쥐셨다. 아침에는 ‘스코츠먼(Scotsman)’지를 읽으시지만, 밤에는 ‘더 타임스’를 보는 걸 좋아하셨다.


나 역시 평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일거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바카라을 들고 몰입해 있었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이 넓은 보도를 거닐며 내뱉는 말들이 열린 창문을 타고 내 소설 속 이야기나 꿈속으로 흘러 들어와 나를 웃게 만들기도 했다. 파이프(Fife)** 지역 특유의 억양, 그러니까 노래하는 듯 묘하게 끝을 올리는 그 파이프 말투는 나에게 무척 생소하면서도 휴가 같은 즐거움을 주었다. 때로는 사람들이 나누는 우스갯소리가 들렸고, 어떤 대화는 한 편의 소설을 상상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곧 발소리가 뜸해지고 목소리들도 잦아들었다. 빛은 여전히 부드럽고 투명했지만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결코 지루하지 않은, 마치 이 빛의 마법과 바깥의 삶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그 긴 저녁 내내,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신비로운 창문을 힐끔거렸다. 고모와 친구들이 나누었던 그 이야기가—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지만—참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밖과 안에서 밀려오는 형체 없는 생각의 흐름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를 때면, 내 눈길은 의도치 않게 자꾸 그 창문에 머물렀다.


그러다 문득 작은 발견과 함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게 창문이 아니라고? 내다볼 수 있는 진짜 창문이 아니라니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인가!’ 고개를 휙 들어 올렸을 때, 내 눈에는 창 너머로 희미한 회색빛 공간이 보였다. 분명 어둑하긴 했지만 길 건너편 방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할 정도의 어둠이었다. 형체는 불분명했지만, 누군가 그 창가로 다가온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만큼 공간감이 느껴졌다. 시력이 나쁜 저 노부인들은 저게 유리인지 벽에 그려놓은 가짜인지 논쟁을 벌였지만, 창유리 뒤편에는 분명히 어떤 공간이 느껴졌다.


정말 바보 같지 않은가! 제대로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단 일 분 만에 알아챌 수 있는 것을 말이다. 지금은 그저 회색빛으로만 보였지만, 거리 건너편에서 방 안을 들여다볼 때 느껴지는 특유의 어두운 공간임이 틀림없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커튼 같은 건 없었지만, 그곳은 분명히—누가 봐도 확실한—방이었다!


나는 스스로가 대견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모가 신문을 바스락거리며 읽는 동안, 나는 고모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 줄 이 발견을 발표하기에 가장 좋은 타이밍을 기다렸다.


그러다 다시 생각의 흐름에 휩쓸려 창문을 잊고 있었는데, 밖에서 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이 들려왔다.


“나 이제 집에 갈란다. 곧 어두워지겠네.”


어두워져?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이람. 이 부드러운 공기 속을 몇 시간이고 더 거닐어도 절대 어두워지지 않을 것만 같은데 말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익숙해진 그 습관대로, 다시 길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아, 이제 보인다! 사실 창가로 누군가 다가온 건 아니었다. 아직은 바카라을 읽기에 충분할 만큼 고요하고 투명한, 무채색의 빛이 남아있어서 불이 켜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창문 안쪽의 공간은 확실히 넓어져 있었다. 잿빛 공간과 공기가 조금 더 깊어진 것이 보였고, 아주 희미한 환영처럼 벽과 그 벽에 기대어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비어 있는 공간이 주는 옅은 어두움과는 달랐다. 아무리 흐릿하게 보여도 형체가 있는 단단한 물건만이 뿜어내는 특유의 검은 존재감—그 잿빛 공간을 뚫고 쑥 튀어나온 커다랗고 검은 형체 말이다. 나는 눈을 더 집중해서 주시했고, 그것이 가구라는 확신을 가졌다. 글을 쓰는 바카라상이거나 어쩌면 커다란 바카라장일 것이다. 이곳이 대학 구관 도서관의 일부이니 보나 마나 바카라장일 게 분명했다. 그 대학 도서관을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그런 장소들을 본 적은 있었기에, 안쪽이 어떤 모습일지 충분히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참 희한한 일이다. 저 노인분들이 그 긴 세월 동안 이곳을 지켜봤으면서, 어떻게 여태 이걸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주변은 이제 더 고요해졌고, 내 눈은 그것의 실체를 파악하려 애쓰며 응시하느라 침침해져 있었던 것 같다. 그때 갑자기 메리 고모가 말씀하셨다.


"얘야, 종 좀 울려주겠니? 이제 램프를 켜야겠구나."


"램프요?" 나는 소리쳤다. "아직 이렇게 환한데요." 하지만 그러고 나서 다시 창문을 돌아보았을 때, 나는 빛이 정말로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밝긴 했지만, 빛이 너무 미묘하게 변해버린 탓에 그 잿빛 공간과 커다란 그림자 같던 바카라장은 순식간에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끝날 것 같지 않은 6월의 스코틀랜드 밤이라 해도***, 결국 마지막에는 어둠이 찾아오고 마는 법이니까.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나는 고모를 위해 종을 울렸고, 당연히 모든 게 다시 선명해질 내일 아침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그 일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바빴거나 평소보다 더 빈둥거렸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게 두 가지는 거의 같은 의미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는 여전히 그 창문 맞은편인 내 자리에 앉아 있긴 했어도, 다른 공상에 빠져 있느라 창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평소처럼 메리 고모의 손님들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다른 주제들뿐이었고, 그렇게 며칠 동안 내 생각을 다시 그 창문으로 돌려놓을 만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주제가 다시 떠오른 건 거의 일주일이 다 되어서였는데, 이번에도 역시 내 생각에 불을 지핀 건 칸비 대부인이었다.


특별히 창문에 대해 무언가를 말씀하신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고모의 오후 손님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일어날 때, 칸비 대부인은 스코틀랜드 노부인들 특유의 그 활기찬 몸짓으로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씀하셨다.


"원 세상에! 저 아이는 아직도 꿈결인 양 저기 앉아 있네. 메리 발카레스, 쟤 어디 홀리기라도 한 거야? 남은 평생 밤낮으로 저기만 앉아 있기로 작정이라도 한 거냐고. 우리 집안 여자들에게는 좋지 않은, 기이한 일들이 주변에 생긴다는 걸 명심해야 해."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대부인이 말하는 대상이 나라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잿빛 안색에 커다란 무늬의 스페인산 레이스를 얼굴 절반이나 드리운 그녀의 모습은 마치 그림 속 인물 같았다. 대부인은 손을 치켜들고 있었는데, 들어 올린 손바닥 안쪽에서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나를 향해 이글거리고 있었다. 분명 놀라서 손을 올린 것뿐이었겠지만, 내 눈에는 마치 저주를 내리려 손을 든 것처럼 보였다. 다이아몬드는 사방으로 빛의 화살을 쏘아대며 나를 노려보듯 번뜩였다. 반지가 제자리(손등 쪽)에 있었다면 상관없었겠지만, 손바닥 안쪽에서 그렇게 빛나다니! 나는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기분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대부인이 웃음을 터뜨렸고, 치켜들었던 손을 내렸다. "이제야 생기가 좀 도네. 내가 마법을 깨뜨렸어." 대부인은 고개를 까닥거렸고, 그 움직임에 따라 레이스에 달린 커다란 검은 실크 꽃들이 위협하듯 출렁였다.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내 팔을 붙잡더니, 꺾인 갈대마냥 떨지 말고 중심을 잡으라며 웃으며 타일렀다.


“네 나이 때는 바위처럼 단단해야 해. 난 젊을 때 어린 나무 같았단다." 내 가냘픈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세게 몸을 기대며 그녀가 덧붙였다. "내 시절에는 나도 파멜라****처럼 미덕의 버팀목이었지."


"메리 고모, 칸비 대부인은 마녀예요!" 돌아오자마자 내가 외쳤다.


"우리 강아지, 그렇게 생각하니? 뭐, 한때는 그랬을지도 모르지."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시는 메리 고모가 대답하셨다.


그리고 그날 밤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우편물과 '더 타임스'지가 배달된 뒤, 나는 문득 도서관 창문을 다시 보게 되었다. 매일 보던 창문이었고 그동안은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 나를 해치려던 칸비 대부인의 사악한 다이아몬드와 내게 경고를 보내듯 출렁이던 그 레이스 때문에 마음이 여전히 소란스러웠던 탓일까. 길 너머를 바라보자 건너편 방의 모습이 이전보다 훨씬 더 또렷하게 보였다. 어렴풋이 보건대 분명 넓은 방이었고, 벽에 기대어 있는 커다란 가구는 글쓰기용 바카라상이 확실했다. 시선이 닿는 순간 아주 명확해졌다. 방 안쪽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커다란 구식 '에스크리투아르(escritoire, 경사진 덮개를 내리면 바카라상이 되는 필기용 바카라상)'였다. 그 형태만 봐도 안쪽에 수많은 서류함과 작은 서랍들이 있고, 넓은 기록용 탁자가 딸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 집 아버지 서재에도 똑같이 생긴 게 하나 있었다.


그 모든 게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서 순간 어지러움마저 느낀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아버지의 바카라상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곧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아버지 바카라상 말고도 그런 바카라상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창밖을 보았다. 그런데, 아! 그 모든 것이 처음처럼 다시 모호하고 불분명해져 있었다. 그저 노부인들이 창문세를 피하려고 메워버린 건지, 애초에 창문이 맞기는 한 건지 확신하지 못하던 그 멍텅구리 창문만이 거기 있을 뿐이었다.


이 생각은 내 머릿속을 온통 점령해 버렸지만, 나는 메리 고모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가지 이유는, 이른 낮 시간에는 그 안이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다. 낮에는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법이니까. 그것이 빈 방이든, 거울이든, 사람의 눈이든, 혹은 그 어떤 신비로운 것이든 말이다. 내 생각엔 빛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6월 저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때가 바로 '무언가'를 볼 수 있는 시간이다. 분명 낮의 빛이 남아있지만 이미 낮은 아닌 시간. 내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특유의 분위기가 그 시간의 빛에는 서려 있다. 그 빛은 어찌나 투명한지, 마치 모든 사물이 자기 자신의 반사된 형상처럼 보일 정도다.


날이 갈수록 방 안의 모습이 점점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에스크리투아르 바카라상은 빈 공간 속에서 더욱더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때로는 바카라상 위에 종이 뭉치처럼 보이는 하얗고 가늘게 빛나는 물건들이 놓여 있기도 했고, 한두 번은 글쓰기용 탁자 옆 바닥에 바카라들이 쌓여 있는 것을 분명히 보기도 했다. 그 바카라들은 마치 낡은 바카라들처럼 금박이 군데군데 벗겨진 채로 빛나고 있었다.

창가에 앉아 있는 주인공의 시선 너머에 커다란 에스크리투아르와 그 위에 놓인 종이, 바카라, 잉크병 등이 보인다. ⓒ Mabon / AI

옮긴이의 친절한 설명

*잉글랜드에서 온 우편물(English Post)

스코틀랜드 기준, 스코틀랜드 지역 신문인 《Scotsman》(스코츠먼)은 아침에 배달되는데, 런던에서 발행되어 올라오는 《The Times》(더 타임스)는 우편 배달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에 오후나 저녁에 받아보는 게 일반적이었다. 메리 고모가 아침에는 지역 소식(Scotsman)을 보고, 저녁에는 런던의 중앙 정세나 국제 뉴스(The Times)를 챙겨본다는 것은 상당히 교양 있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밝은 지식인 층이라는 의미임.

※ 더 타임스(The Times): 1785년에 창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일간지) 중 하나. 1923년에 창간된 빨간 테두리의 미국 시사 주간지(TIME - 올해의 인물 선정하는 그 타임)와는 다름. 영국에서는 보통 'The Times'라고 정관사를 붙여서 부른다.


**파이프 지방 (Fife)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의 지방. 지리적으로는 에딘버러 위쪽이며 포스 브리지(Forth Bridge -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유명한 철교)로 에딘버러 지역과 연결되어 있다. 파이프 지역 방언은 문장의 끝을 살짝 올리거나 단어 사이에 독특한 고저 차이가 있는 '릴트(Lilt)' 현상이 뚜렷한데 주인공이 그들의 말투를 듣고 "노래하는 것 같다"라고 느낀 것은 바로 이 리드미컬한 억양 때문이다.

※ 마거릿 올리펀트 본인이 이 파이프 출신임. 올리펀트는 로디안(Lothian) 지방의 월리포드(Wallyford)라는 곳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의 중요한 시기를 파이프의 항구 마을인 커콜디(Kirkcaldy)에서 보냄.

※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에서 주인공의 숙적인 맥더프가 파이프의 영주(Thane of Fife)임.


***스코틀랜드의 백야 (White Night/Simmer Dim) 스코틀랜드는 위도가 높기 때문에 6월 하순(하지 무렵)에는 밤 11시가 넘어도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고 은은한 황혼이 지속되는 '백야' 현상이 나타난다. 낮도 밤도 아닌 이 기묘하고 창백한 빛은 소설 속에서 창문 너머의 환상과 현실이 뒤섞이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하는 장치가 된다.


****파멜라

18세기 작가 새뮤얼 리처드슨의 소설 《파멜라》의 여주인공으로, 극단적인 도덕성과 인내심의 상징.


소제목 '나에게만 보이는 바카라상'은 원작에는 없습니다. 올리펀트는 챕터를 숫자로만 구분해 두었습니다. 온라인카지노에 연재하기 위해 임의로 소제목을 달아 놓은 것임을 참고 부탁드립니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



이전 02화모든 일의 시작은 그 창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