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받은 가장 큰 축복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그는 신들의 냉랭함에 한기를 느끼면서도 차분히 생각했다. ‘저들은 숨기는 것 없이 직설적으로 말한다. 오히려 브래넌 퀸시보다 더 협상하기 쉬운 상대야.’
게로스는 신들에게 말했다. “원하신다면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그는 이윽고 세라비가 앞뜰로 나와 자신과 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매우 신기한 일이었다. 게로스는 신전을 등지고 신들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세라비는 그의 뒤쪽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온몸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된 것처럼 감각이 맑고 선명해진 것을 느꼈다. 그는 세라비뿐만 아니라 그의 옆쪽과 뒤쪽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표정을 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신들의 냉소적인 표정도 그는 또한 볼 수 있었다. 신들은 그에게 말했다.
《네가 받은 신들의 가장 큰 축복을 바쳐라.》
게로스가 그게 대체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신들이 다시 말했다. 《너의 얼굴, 너의 아름다움을.》
게로스는 당연히 목숨을 내놓으라고 할 줄 알았기 때문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이 얼굴 말이지. 너무 잘나서 평생 동안 사람들이 근처에 다가오지도 못했고 그의 왕비 후보에 이름만 올렸던 여자는 자기 방에서 칼에 찔려 죽고, 전 세계가 4년 동안이나 죽이고 불태우며 전쟁하게 만든 이 얼굴이 신들에게도 그렇게 중요한 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줘 버리고 전쟁이 안 나게 할 걸 그랬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차피 저주를 받았으니 언제까지나 가지고 있지도 못했을 이 따위 얼굴, 이것만 주면 되는 것인가?
“어차피 전 저주받아서 제 모습은 언젠가 사라집니다. 상관없습니다.”
그가 저주라는 말을 하고 그 발음의 낯설음에 놀랐다. 그 단어는 평생 그의 머릿속에 있었으나 한 번도 입 밖에 내어 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신들의 냉정한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 같다고 게로스는 생각했다. 그들은 표정이 없었기 때문에 아마 게로스의 착각일 터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까와는 분명히 다른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저주는 없다, 칼베르의 왕이여. 너의 어머니가 자기 목숨을 대가로 너의 저주를 풀었다.》
게로스는 갑자기 절벽 아래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신들이 그의 눈앞에 절벽 아래의 강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뒷배경에 절벽과 신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 근처임에 틀림없었다.
금발의 여자가 한 손에는 단검을 들고, 한 손에는 피를 흘리며 강가에 쓰러져 있었다. 그 여자는 입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다. 게로스는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초상화에서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구나.’
다른 여자가 어머니 곁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플레베르 신전의 여사제의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에 난 상처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다쳤는지 다리를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끌며 어머니에게 기어가서 손에서 계속 뿜어져 나오는 피를 멈추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강물에는 핏빛의 글자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다시 한번 피를 토하자 그것들은 물결 속에 휘말려 감기더니 강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환영은 끝났다. 신전 앞뜰에 있던 그 다른 누구도 신들이 보여준 환영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게로스의 옆에서 유물에 손을 얹고 있던 플로르에게는 환영이 보였다.
플로르는 자신이 본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여자가 그가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저건… 페르카 원장님이잖아!’
게로스는 어머니가 죽어가는 모습을 굳이 아들에게 보여주는 신들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초상화에 있던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은 신기한 광경이었다. 그 모습이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만 아니었다면.
그러나 이내 그는 그것보다도 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저주가 없었다고?’
어릴 때부터 평생 그의 마음속 깊은 구석에 차마 꺼내기도 두려워서 묻고, 묻은 곳을 또 묻어 두었던, 아버지처럼 변해서 죽어가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그 저주는 사실은 이미 풀려 있었다. 무서워서 울며 잠들었던 수많은 밤들과 자신의 얼굴이 변해 있을까 봐 거울도 보지 못했던 수많은 나날들을 떠올리며 그는 절벽 밑으로 추락하는 것 같은 아득함을 느꼈다.
그는 울며 잠들 필요도, 거울 보기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마음껏 자랑하고 뽐내며 살아도 상관없었다. 그의 얼굴은 본래부터 그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자마자 그는 다시 그것을 신들에게 바쳐야만 했다. 그는 그 자신의 것이었던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 순간도 누려 보지 못했다. ‘다른 게 저주가 아니라, 이게 저주다.’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의 나라가 멸망해 가고 있었다. 그는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숙였다. 그때, 신들의 목소리가 다시 그의 귀를 때렸다.
《이카리아의 왕이 될 너도, 너의 것을 바쳐라. 너의 젊음, 너의 미래를 바치고 대가를 치러라.》
플로르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젊음? 그걸 어떻게 바치는 거지?’
그러나 신들은 거대한 눈이 된 것처럼 그를 내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플로르는 너무나 무서워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등 뒤에는 레이와 세라비, 그리고 레이첵이 있었다. 여기까지 올 때에는 그들이 그를 끌고 업고 보살피며 왔지만, 사실은 그들을 지켜야 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자기 나라 백성들 앞에서 전 무서워서 안 되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플로르는 눈을 꼭 감았다. 게로스 폐하는 저렇게 당당하게 ‘상관없습니다’라고 말했으니 그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플로르는 간신히 입을 움직여 “네.”라고 대답했다.
게로스는 신들이 플로르에게까지 뭔가를 요구하는 것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그래, 두 나라의 왕가에 선물을 주었으니 양쪽에서 다 대가를 받겠다 이거지. 영원히 사는 신들이 열다섯 살 먹은 소년에게 젊음은 받아다 뭐에 쓰려는지 모르지만, 플로르가 무서워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주제에 “네”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니 게로스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젊음을 가져간다는 것은 이 아이가 순식간에 노인의 모습이 되거나 급속히 노화해서 빨리 죽는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플로르가 겁에 질려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게로스의 머릿속에는 저주의 기록을 발견하고 무서워서 숨죽여 울던 어린 시절의 자신의 모습이 스쳐갔다. 그는 플로르에게 특별히 대단한 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 아이가 자신처럼 두려움에 떨며 잠드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두 팔로 플로르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며 신들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너무 어려서 젊은 게 뭔지도 모릅니다. 제게서 다 가져가십시오.”
플로르는 놀라서 게로스를 쳐다보았다. ‘당신이 왜요?’라고 묻는 소년의 눈을 보자 게로스는 결심을 굳혔다. 그는 플로르를 신들에게서 멀어지도록 부드럽게 밀어내고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아, 이건 기사 서임 자세잖아’하고 그는 생각했다. ‘생의 마지막 자세로는 꽤 괜찮을지도…’
그때, 뒤에서 갑자기 아우성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라비였다. 그녀는 신들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얼굴 가져가면 안 돼요! 저 사람은 그게 제일 장점인데 그걸 가져가면 어떻게 살라구요!”
게로스는 세라비가 고대의 검을 뽑아 들고 달려오는 것을 느끼며 웃음을 참았다. 아, 세라비, 얘는 신들 앞에서도 한결같네. 그런데 정녕 다른 장점은 하나도 없었니?
그는 무서운 신들에게 검을 겨누고 덤벼드는 저 무모한 망나니 같은 여자를 너무나 사랑했다.
달려가던 세라비는 신들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샤토 데쥬의 솔렌의 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 장벽에 튕겨 나뒹굴었다. 세라비는 다시 몸을 일으켜 덤벼들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팔이 세라비를 단단히 붙잡았다.
“누나!” 레이첵이 울면서 세라비의 팔에 매달렸다. “안 돼요… 누나 죽어요!”
세라비가 발버둥치자 레이첵은 더욱 서럽게 울며 세라비를 붙들었다.
눈부신 빛이 신들이 선 곳에서부터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빛은 모든 사람의 눈을 멀게 할 것처럼 타오르며 신들에게서 나와 게로스를 에워쌌다. 모두 땅에 엎드려 눈을 가렸다. 레이만이 진짜로 눈이 멀 것을 각오하고 겨우 실눈을 뜬 채 게로스를 보았다. 그는 게로스에게 미래를 알려준 사람으로서 그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것이 그가 게로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이자 마지막 예우였다.
그는 게로스에게서 무언가가 뜯겨 나가는 것 같은 광경을 겨우 보고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한참 후 눈을 떠 보니 빛은 사라져 있었다. 신들도 사라지고 없었다. 게로스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옆에는 솔렌과 뤼넬이 깨진 채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