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창조신들

우리는 너희가 서로를 구분하는 방법에는 관심이 없다

by마봉

《세라비: 장하다 라를르의 딸》은 장편 소설입니다.

◆ 캐릭터 소개

◆ 처음 오신 분은 1화부터 읽어 주세요.


밤새 달린 말발굽 소리가 멈추었다. 로멜리 쉬르쿠젤 마을은 조용했다. 플로르 왕자는 강 저편에 희끄무레하게 동이 트는 하늘을 배경으로 높이 솟은 절벽과 신전을 바라보았다.


파렌베르크로 보냈던 레이가 갑자기 트루아벨의 대공저에 나타났을 때 플로르는 혼자 돌아온 레이를 보고 세라비가 죽어서 레이 혼자 돌아온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이윽고 레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욱 놀라웠다.


“신들의 유물을 깨우려면 두 왕가의 혈통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샤토 데쥬에서 그가 두 유물을 합쳤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고 레이는 설명했다.


“게로스 폐하가 솔렌을 가지고 로멜리 쉬르쿠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하시죠.”


플로르는 이 상황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가 칼베르에 온 것은 솔렌이고 뤼넬이고 뭐고 그저 게로스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파렌베르크에 겨우 도착해서 게로스를 만났으니 플로르의 목적은 이루어졌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전쟁을 피해 트루아벨로 오게 된 후 그는 자신이 칼베르에서 뭘 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게로스의 마음은 세라비에게로 갔고, 트루아벨로 피난을 오는 바람에 그를 옆에서 지켜만 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나는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앞으로 할 일이라곤 무사히 이카리아로 돌아가는 것뿐이네.’


그러나 레이가 전한 그 말에 플로르의 가슴은 요동쳤다. 세라비를 따라 칼베르에 가기로 했을 때에는 전혀 몰랐지만, 결국 그가 여기 온 의미는 유물들을 깨우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이 나라에서 이카리아 왕가의 혈통을 어떻게 찾을 것이며 솔렌과 뤼넬은 결국 깨울 수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지금 바로 출발해요.” 플로르가 일어나며 말했다.


“전하, 오늘은 일단 주무시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시죠.” 옆에 있던 오귀스트 대공이 말했다. 그러나 플로르는 고개를 저었다.


“폐하는 솔렌과 뤼넬의 전설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그것들이 필요하다고 하신 것은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뜻일 거예요. 거의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꺼내 드신 것일 겁니다. 우리가 여기서 하룻밤 편히 자는 동안 파렌베르크에서는 누군가 죽고 있을 거예요. 지금 가야 합니다.”


레이는 팔레 에클라에서 게로스 폐하를 보러 칼베르에 가고 말겠다고 울면서 외치던 플로르 왕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내 앞날은 상당히 보장되어 있다고 봐도 되겠군…’


오귀스트 대공은 서둘러 떠날 준비를 했다. 플로르 왕자는 뤼넬을 품 속에 소중히 넣었다.


그들은 한밤중에 트루아벨을 출발해 카마의 빛에 의지하여 깜깜한 밤길을 달렸다. 동쪽 하늘에 희미하고 가냘픈 푸른빛이 보일 무렵 그들은 로멜리 마을을 통과해 절벽 반대편 산등성이를 따라 난 완만한 길을 올라 신전 앞뜰에 이르렀다. 신전 문 앞을 밤새 지키고 있던 호위병이 오귀스트 대공의 호위대를 알아보고 크게 반겼다.


게로스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그는 조용한 새벽 공기를 뚫고 말발굽 소리가 산길을 따라 올라오는 것을 듣고 바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플로르만 데리고 올 줄 알았더니, 대공까지 왔군.’


게로스는 아직 난롯가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자고 있는 세라비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일어났어?” 세라비가 눈도 안 뜬 채 물었다.


“응. 플로르가 왔어. 대공이랑 세르비카 서기관… 레이첵도 왔으니까 아래로 내려와. 나 먼저 가 있을게.”


세라비는 몸을 일으켰다. “레이첵도 왔어?”


게로스는 멍한 얼굴로 눈을 비비고 있는 세라비를 잠시 바라보다가 꼭 끌어안았다. 계절은 겨울 초입이고 그들이 있는 곳은 신전의 내실인데도 라벤더와 들판의 풀 냄새와 숲의 바람 냄새가 코끝에 느껴졌다.


“너 라를르의 집에 꼭 돌아가게 해 줄게.”


세라비는 아직도 비몽사몽인지 ‘아웅’ 소리를 냈다. 게로스는 세라비의 볼을 한 번 쓰다듬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게로스 세라비 내실-1.png이불 돌돌 말고 잠 덜 깬 세라비와 세라비를 바라보는 게로스 (창 밖은 아직 이른 새벽) ⓒ Mabon / AI

첫 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새벽 공기 사이로 파문을 그리며 번져 나갔다. 너도밤나무 숲에 둘러싸인 신전의 돌이 깔린 안마당 위에 플로르가 서 있었다. 레이는 그 옆에서 레이첵이 말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게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품에 손을 넣어 솔렌을 꺼냈다. 플로르는 말을 달려오느라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는 게로스를 발견하자마자 급히 달려왔다. 플로르의 손에는 뤼넬이 들려 있었다. 그는 게로스의 손 위에 올려져 있는 솔렌 위에 뤼넬을 얹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걸까요?”


게로스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뤼넬은 이미 딸깍 소리를 내며 솔렌의 받침 위에 끼워졌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플로르가 실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 순간 게로스는 허공을 바라보고 얼어붙었다.


아무것도 없던 공기 속에 갑자기 누군가 낙서를 한 것처럼 윤곽선이 그어지고 있었다. 레이도, 말에서 내린 레이첵과 오귀스트 대공도, 코린과 호위병들도, 종을 다 치고 종탑에서 나온 사제도, 아침 첫 기도 준비를 하다가 대공 일행을 맞이하러 나온 신전의 사제들도 모두 멍하니 서서 커다란 형체들이 선으로 그어지고 면이 입혀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형체들은 마치 그곳에 천 년도 넘게 세워져 있던 석상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셋이었고 사람 키보다 세 배쯤 컸다. 성별도 나이도 인종도 구분이 불가능한 그들의 모습은 템푸스 아르카의 창조신들의 신전에서 본 그대로였다. 플로르는 그들이 신전에서 본 석상들처럼 무서운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고 몸을 떨었다.


그들은 멀리서 바라본 템푸스 아르카의 도시처럼 일렁이다가 또렷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모습이었다가 공기를 일그러뜨리며 인간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도 바뀌었다. 오델 몽테에서 본 괴물의 모습이기도 했다가 욘도로케처럼 몸집이 작고 귀가 뾰족한 모습이 되기도 했다가 고대 유적의 벽화에 그려진 것 같은 용의 형상을 띠기도 했다.


레이는 그들이 인간만의 신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들은 괴물의 신이기도 했고 요정의 신이기도 했으며 또 다른 많은 이상한 생물들의 창조자였다. 그리고 대현인의 말처럼 인간을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는 것이 틀림없었다. 레이는 그들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눈길로 그들을 불러낸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것을 보고 자신이 본 미래의 장면을 떠올렸다. 이제부터 일어날 일들이 그가 본 대로인지 아닐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들의 부탁을 쉽게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것은 분명했다.


신들은 차가운 미소를 띠고 그들의 발치에 유물들을 손에 쥔 채 서있는 게로스와 플로르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구분할 수 없는 그들의 눈은 마치 템푸스 아르카에 입장할 때 백열광의 화염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게로스는 신들 앞에서 마치 벌거벗은 것처럼 모든 것을 읽히고 꿰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들은 입을 열었다. 그들의 말은 목소리가 없었으나 그 자리에 선 모든 인간들의 뼛속까지 울리며 선명하게 들렸다.


《그것들은 칼베르와 이카리아의 왕실에 준 선물이다. 원하는 것이 있는가?》


게로스는 신들을 올려다보았다. 괜찮아, 하고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상냥하게 웃다가 뒤에서 찌르는 사람보다는 무서워 보이는 신들이 더 믿을 수 있는 존재들일 거야.


“외국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위험에 처했습니다. 약속에 따라 위기에서 구해 주십시오.”


레이는 게로스가 무서운 신들에게 마치 외교 협상하듯이 대하는 것을 보고 긴장했다. 저래도 되는 걸까? 신들이 노여워하면 어쩌지? 신들이 분노해서 게로스를 죽이는 것일까?


그러나 레이는 그것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인간이 고분고분하게 말한다고 해서 신들이 그 말을 반드시 들어주는 것이 아닌 것처럼, 당당하게 대한다고 들어주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게로스와 플로르를 바라보는 신들의 눈길은 차갑고, 불만스럽고, 불신과 심지어 혐오마저 느껴졌다. 그들이 그의 요청을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 것을 게로스는 느낄 수 있었다.


《인간들은 힘을 빌려달라고 애원한 다음, 같은 인간들끼리 해치고 죽인다.》


플로르는 침을 꿀꺽 삼키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희가 아니라 외국 군대가 우리를 해치러 온 것입니다.”


《우리는 너희가 서로를 구분하는 방법에는 관심이 없다.》


게로스는 절망했다. 그리고 동시에 짜증도 났다. 2천 년 전에는 뭐 인간들이 크게 달랐나? 도와준다고 유물을 내주었으면 그냥 도와주는 거지 뭘 또 거기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저들이 기분 나쁘다고 사라져 버리면 이제 칼베르도 이카리아도 희망이 없었다. 스칼하븐이 그들을 지원하러 와도 그 이후에 벌어질 미래는 끝이 언제인지, 누가 승리할지 알 수 없는 길고 소모적인 싸움뿐이었다. 그것도 그의 나라인 칼베르 땅에서 펼쳐질.

창조신들-2.png새벽의 신전 앞에 나타난 세 창조신들 ⓒ Mabon / AI

◆ Illustrations by Mabon de Forêt(AI-assis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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