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내 얼굴을 가까이에서 자주 보던 지인이 있었다.
그는 본인이 사람을 많이 상대해 봐서 아는데, 내 눈빛에는 우울이 보인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내게 우울은 누군가가 "조금만 더 해 봐."라고 말하는 것조차 폭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난 이미 할 만큼 했다고 느끼는데도, 사람들은 한 걸음 더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우울을 넘어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 일인지 나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지만.
이런 감정 따위 느끼지 않고 기계처럼 그냥 조금 더 하면 나에게 도움이 되려나.
이런 날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무생물이 되고 싶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 그저 가만히 있어도 되는 존재 말이다. 모순적이게도 나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혼자인 것을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이다.
가끔은 이런 모순적인 나 자신을 견디기조차 힘들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 같은 실수를 했을지 모른다. 나에게 있던 명랑한 기운으로 조금 더를 외치면서.
사람의 여유공간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의 '조금'을 말한다.
내가 처음 예배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나에게 무엇을 더 해내라고 요구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경험을 먼저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엄마는 늘 내 장점을 명랑함이라고 말했다. 초등학교 자기소개서의 장점란에도 '명랑하다', '스스로 알아서 잘한다'는 말을 적어 주셨다. 그만큼 밖으로 나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스스로 길을 찾는 내 모습을 보셨던 것이다.
한 사람은 내 눈빛에서 우울을 봤고, 다른 한 사람은 내 안의 명랑함을 봤다.
나는 두 사람 모두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건, 가까운 친구들은 나를 두고 감정기복이 큰 사람이라고 말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을 반짝이며 술잔을 채우고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어느 순간 눈빛이 풀리고 말수가 줄어든 채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봤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들은 엄마가 말한 명랑한 나와, 지인이 말한 우울한 나를 모두 봤던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둘 중 하나만이 진짜인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그중 더 자주 마주한 모습을 기억할 뿐이다.
다만 살면서 이런 내 모습이 타인에게 오해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
내가 명랑한 모습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그것을 내 기본값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지쳐 멈춰 서 있을 때도, 예전의 나를 기준으로 "조금만 더 하면 되잖아."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결과로 사람을 기억한다. 그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얼마나 오래 버텼는지 남들은 볼 수 없다.
그래서 가끔은 '조금만 더'라는 말이 응원이 아니라, 이미 오래 버틴 사람에게는 가장 잔인한 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조금'을 꺼내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미 써 버렸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예전처럼 쉽게 웃지도, 쉽게 나서지도 못한다.
명랑함을 잃고 싶어서가 아니다.
더 이상 꺼내 쓸 마음의 여유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