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길은 다 보이지 않는다.

byHenry
아침 안개.jpg아침 안개


갑자기 세상이 사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저 너머에는 느린 걸음으로 올라도 반 시간이면 닿는 야트막한 구릉이 있고, 텃밭을 가꾸는 농장의 작은 움막이 있다. 주말이면 도시에서 온 사람들의 차가 움막 앞에 서 있고, 어떤 날은 산길에도 차가 보인다. 따가운 햇살이 누그러질 무렵이면 손녀를 아기 자전거에 태우고 걷던 산바카라길도 그 곁으로 나 있다. 한여름을 지나며 농장에는 고구마 넝쿨이 웃자라 부드러운 흙 위를 파도처럼 덮었다. 뜨거운 8월의 해를 견딘 수박과 토마토, 옥수수는 수확을 끝내고 앙상한 줄기만 남았다.


풍경이 사라졌다.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멀리 초록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서로 어깨를 기대며 한낮의 여름을 식히던 숲도 보이지 않는다. 숲 사이로 보이던 농장 움막은커녕 아파트 안쪽의 놀이터조차 보이지 않는다. 눈앞에서 조금만 멀어지면 회색 커튼이 드리워진 풍경만 펼쳐진다.


안개다. 아침 안개가 내가 알던 모든 풍경을 에워쌌다. 희미한 빛은 아파트 화단과 맞은편 동의 윤곽만 겨우 드러내고 있다. 가을이 내려앉은 땅은 여름의 열기를 아직 다 식히지 못했고, 공기 속 수증기는 미세한 물방울이 되어 떠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것들이 모여 내가 알던 세상을 통째로 지워버렸다.


해가 조금 더 오르면 안개는 곧 걷힐 것이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흔적도 없이, 구릉도, 작은 움막도, 고구마밭도, 손녀와 걷던 길도 다시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오고, 나 역시 익숙한 일상과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우리 삶도 이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앞날을 알 수 없는 불안과 끊이지 않는 문제들, 갈등과 번민도 해가 뜨면 흔적 없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대학원 시절이었다. 도서관에서 발표 준비에 매달리다 지도교수 방의 불을 끄고 나오면, 복도 끝 창문에 낯선 얼굴 하나가 비쳤다. 경비 아저씨께 인사를 건네고 건물을 마지막으로 빠져나오면 차가운 겨울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간을 다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보이지 않았을 뿐, 그때도 길은 거기에 있었다. 끊어진 줄 알았던 길도 결국 어디론가 이어져 있었다.


창밖을 다시 내다본다. 화단의 윤곽이 조금 더 짙어졌다. 맞은편 동도 아까보다 한 발짝 다가와 서 있다.


'내가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 것 같다. 버킷 리스트로 남겨둔 일들도 미루지 않고 하나씩 해 보리라 싶다. 그러나 지금 아는 것, 경험한 것을 모두 품고 아팠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달라지지는 않는다. 선택 하나를 바꾸는 순간부터 내가 살아 보지 않은 삶이 시작되고, 그곳에는 또 한 번도 걸어 보지 않은 길이 놓여 있을 테니까.


살아보고, 느끼고,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얻은 깨달음을 누군가에게 들려줘도 좀처럼 먹히지 않는다. 그건 그때의 이야기이고, 지금 내가 맞닥뜨린 삶은 전혀 다른 날것의 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그랬다. 어른들이 아무리 앞날을 이야기해 줘도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였을 뿐, 내 앞에 놓인 길은 내가 처음 걷는 길이었다.


지금의 청춘도 저마다의 안갯속을 걷고 있을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아 불안하고,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 서성이며, 때로는 길을 잘못 들었다고 자바카라할지도 모른다. 안개 너머에 길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그 말조차 안개 밖으로 먼저 걸어 나온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한 시간 전보다 안개가 한결 옅어졌다. 아파트 끝자락의 나무들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오가는 사람들이 보이고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차들도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화단의 배롱나무에는 빨간 꽃잎이 다시 얼굴을 내밀고, 서서 꼬박 밤을 새운 놀이터의 일곱 난쟁이도 볼록한 배를 드러낸다.


지나온 길은 이제 안다. 어디에서 길을 잘못 들어섰고, 그 바람에 얼마나 오래 헤맸는지도 안다. 그때 옆길로 들어섰더라면 조금 덜 아팠을까, 조금 덜 헤매었을까 생각해 보지만 그걸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 가보지 않은 길에는 기억이 없으니, 그곳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내게 남은 시간은 어떤 모습일까. 지나온 길보다 짧아졌을 뿐, 앞으로의 길 역시 한 번도 걸어보지 않은 길이다. 살아오며 얻은 경험이 있으니 안갯속에서 마냥 헤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햇살 아래 모든 것이 선명하게 드러난 길도 아닐 것이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헤어질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지는 아직 짐작할 수 없다.


잠에서 깬 가을 햇살이 안개를 밀어내고 있다. 건너편 산등성이가 차츰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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