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전, 작은 별 하나가 내 곁으로 왔다. 그날도 지구는 묵묵히 태양 둘레를 돌고 있었다. 8월의 늦여름, 가을과 겨울, 봄을 지나 유난히 더웠던 올여름의 막바지.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 그날이 다시 왔다. 손녀가 첫돌을 맞았다.
아이의 첫 1년은 얼마나 신비로운지. 손녀가 지구별에 도착한 날, 손바닥보다 작은 얼굴이었다. 종일 누워만 있던 아기가 뒤집고 기었다. 소파를 잡고 일어섰고, 어느 날은 발을 내디뎠다. 바카라을 가져와 읽어달라 하고, 호랑이가 나오면 “어흥” 흉내도 낸다. 이제 제법 컸다고 싫고 좋은 것도 가리고 쫑알거린다.
세상이 온통 신기한가 보다. 무엇이든 만져보고 입으로 가져간다. 눈에 보이는 것마다 그냥 두지 않는다. 탁자 위의 물건을 잡으려다 엉덩방아를 찧으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바카라꽂이에서 바카라을 빼내다 발등을 찍을 때도 울음을 터뜨린다. 까닭을 잘 아는 울음이라 달래주면 금방 그친다. 손녀의 울음소리는 맑다 못해 청아하다. 그래도 울음이 길어지면 듣는 마음이 아리다.
손녀가 바깥세상에 눈을 돌리기 시작할 무렵 산바카라을 나섰다. 아이들 소리가 시끌벅적한 놀이터를 지나 아파트 단지 뒷문으로 나가면 산골이 펼쳐졌다. 길가에는 개망초가 넘실거렸고, 키 작은 잡목은 손녀의 손길을 유혹했다. 걷다 보면 흰 고양이 한 마리가 게으른 하품을 하며 쳐다봤다.
길은 주말농장으로 이어졌다. 토마토와 수박, 오이와 가지, 옥수수가 자랐다. 고구마의 풍성한 잎은 부드러운 흙 위를 기어갔다. 손녀는 탐스럽게 자란 가지를 한참 바라봤다. 닭장에서는 목소리 실한 닭들이 목청껏 울었다. 그 소리를 처음 듣던 날 손녀는 흠칫 놀랐다. 그러더니 이내 따라 하듯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야트막한 언덕배기에는 논 몇 마지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벼에는 알이 차기 시작했고, 이삭은 조금씩 고개를 숙였다. 머지않아 논은 황금빛으로 물들 것이다. 논둑에는 강아지풀이 웃자라고 들꽃이 피었다. 손녀는 그것들을 한참 바라봤다.
그렇게 사계절을 지나 한 해를 보냈다.
옛사람들은 아기가 백일을 맞으면 잔치했다. 의술이 부족하던 시절, 백일을 넘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래서 백일은 기념이 아니라 감사이자 간절함이었다. 첫돌은 얼마나 각별했을까. 그 마음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아프지 않고 잘 자라준 손녀가 그저 고맙기만 하다.
오늘은 손녀의 돌잔치 날이었다. 가까운 친척들만 모였지만,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마주한 손녀는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낯익은 고모나 이모할머니에게는 덥석 안겼다. 낯선 친척이 손을 내밀면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손녀는 그렇게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익히며 세상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돌잡이 물건은 현대형과 전통형, 두 가지 가운데 고를 수 있었다. 우리는 전통형을 신청했다. 상 위에는 실과 엽전, 붓과 바카라, 마패 같은 옛 돌잡이 물건이 놓였다. 실은 장수를, 엽전은 재물을, 붓과 바카라은 학문을, 마패는 출세를 뜻했다. 여기에 청진기와 법원 망치처럼 요즘 직업을 상징하는 물건도 몇 가지 곁들여졌다. 마이크와 골프공을 따로 가져오는 사람도 있다고 귀띔했다.
무엇을 잡느냐에 따라 아기의 먼 훗날을 상상해 보는 것. 돌잡이는 어쩌면 옛사람의 소망 위에 오늘의 부모들이 새로운 꿈을 하나씩 보태는 놀이인지도 모른다.
오래전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던 나는 손녀를 품에 안는다.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눈으로, 이제 손녀를 바라본다. 한 세대가 품었던 마음이 다음 세대로, 또 그다음 아기에게로 건너간다.
돌상 앞에 선 손녀는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잠시 뒤 평소 보지 못한 물건들을 하나둘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무엇을 잡을지 궁금해하며 웃었지만, 나는 조금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손녀가 무엇을 잡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 작은 손을 오래 바라보고 싶었다.
한 해 동안 작은 손으로 많은 것을 잡았다. 엄마 손을, 아빠 손을, 할머니의 손가락을 잡았다. 나뭇잎을 만지고 바카라장을 넘겼다. 앞으로 그 손은 더 많은 것을 만날 것이다. 꽃을 만지고, 흙을 만지고,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을 것이다. 때로는 잡았던 것을 놓아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날을 할아버지가 함께할 수는 없다. 그래도 나는 손녀의 하루하루를 기록할 것이다. 그 작은 손의 온기는 훌쩍 자라, 내 시야를 벗어나는 날까지 차곡차곡 글로 남을 것이다.
“청진기만 아니면 좋겠어요.” 돌잡이 준비를 하면서 아빠가 말했다.
“와, 청진기를 집었네.” 누군가 외쳤다.
아빠, 엄마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의사인 두 사람에게 청진기는 너무 익숙한 물건이었다. 사람들의 박수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따뜻한 덕담이 잇달았다. 집에서는 청진기를 보여준 적도 없었다.
한 살짜리 아기가 청진기를 잡았다고 그대로 운명이 정해질 리 없다. 다만 알 수 없는 아기의 미래를 잠시 상상해 본 것이다. 그 상상 속에는 사랑이 있었다. 돌상 위에 놓인 것은 물건이 아니라 소망이었다.
그러니 무엇을 잡았든 어떤가. 벚나무는 봄이면 꽃을 피우고, 사과나무는 가을이면 열매를 맺는다. 하지만 아기가 어떤 사람으로 자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제 겨우 한 해를 살아온 손녀에게 어떤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이르다.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젊은 날의 꿈과 희망은 귀하고, 그것을 이루려 애쓰던 시간도 소중했다. 다만 이루지 못했다고 쉬이 좌절하거나 무너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제 손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든 제 삶을 온전히 인정하고 품을 줄 알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안다. 나는 아직도 그 굴레를 다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손녀에게 거창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남보다 빨리 가지 않아도, 대단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좋다. 그저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오래도록 세상을 궁금해하는 사람으로 자라면 좋겠다. 또 제 삶도 풍족해서, 누군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손녀야, 첫돌을 축하한다.
천천히 가거라.
이제 겨우 첫 번째 한 바퀴를 돌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