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돌아오는 사람의 가방에는

오래된 얼굴은 잘 늙지 않는다

by민들레C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회사에서 오래 근무한 선배 한 분이 직원 한 사람을 소개해주었다.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부서와 그의 일이 이따금 맞닿았고, 그때마다 필요한 것을 빠뜨리지 않고 챙겨오며 자기 몫을 또렷하게 해내던 사람이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말을 트게 되었고, 가끔 점심을 먹으며 회사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됐다.


벌써 십육 년, 어쩌면 십칠 년쯤 전의 일이다.


이렇게 숫자로 세고 나면 조금 놀랍다. 그동안 부서도 여러 번 바뀌었고 하는 일도 달라졌으며, 둘 다 회사 안에서 꽤 많은 계절을 보냈다. 거울을 보면 세월이 지나갔다는 것을 모를 수 없다. 눈가에는 전에 없던 선이 생겼고 머리카락 사이에는 희끗한 것이 하나둘 늘었다. 그 사람에게도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갔을 것이다. 회사 안에서 겪은 일도, 집으로 돌아가 혼자 삼켰던 마음도, 잘 풀린 시절과 마음대로 되지 않던 시절도 차곡차곡 얼굴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래된 사람을 만날 때에는 이상한 메커니즘 하나가 작동한다.


분명 지금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그 뒤로 처음 만났던 시절의 얼굴이 희미하게 겹쳐 보인다. 세월이 지워지는 것은 아닌데 그 시간들이 한꺼번에 포개진다. 그래서인지 그 사람을 지금 보아도 내 눈에는 가끔 그때의 풋풋한 모습이 먼저 들어온다. 아마 상대도 나를 보며 비슷한 착시를 경험할지 모른다. 서로가 아직 지금만큼 많은 것을 알지도, 짊어지지도 않았던 때의 얼굴.


그 시절 우리는 가끔 밥을 먹었다. 에너지가 남아돌던 때라 점심시간에도 회사에서 누가 어떻다더라, 어느 부서가 어떻다더라 하는 가십을 제법 재미있게 나누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시시한 이야기들이지만 그때의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며 서로를 조금씩 알아갔다. 그러다 내가 부서를 옮기고 그 사람의 일도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접점이 줄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밥을 먹으면 많이 본 것이었고, 어떤 해에는 로비에서 우연히 마주쳐 반갑게 인사한 것이 전부였다.


회사에서 오래 이어지는 인연은 대개 그런 식이다. 아주 가까워지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멀어지지도 않은 채 서로가 같은 건물 어딘가에서 자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살아간다.


나는 오래 일할수록 그런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게 됐다.


회사를 떠받치는 사람을 생각할 때 꼭 임원이나 큰 조직을 맡은 리더, 눈에 보이는 실적을 만들고 직접 수익을 가져오는 사람만 떠올리지는 않는다. 회사가 큰 방향을 하나 정하면 그것을 실제 하루로 만드는 데에는 아주 많은 손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큰 아젠다를 자기 기능의 언어로 바꾸고, 누군가는 다른 부서와 앞뒤를 맞추며, 누군가는 아무도 크게 주목하지 않는 일을 정확하게 반복한다. 그런 촘촘한 협업이 쌓여야 조직의 거대한 내러티브도 비로소 현실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무슨 거창한 역사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며 출근하지 않는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하고, 어제 미처 끝내지 못한 것을 이어받고, 자기 앞에 온 문제 하나를 처리한다. 그럼에도 내가 하는 일이 어딘가에는 필요하고, 내 손을 거쳐 다음 사람의 일이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품고 일한다.


어쩌면 회사원들은 그런 작은 최면 하나쯤을 스스로 걸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도 오랫동안 그런 자리에서 일해왔다. 자기 일을 요란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내가 예전에 몸담았던 기능과 이런저런 일로 맞닿을 때마다 작은 역할을 작지 않게 해냈다. 조직은 그런 사람들에게 더 자주 고맙다고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조직이라는 것은 늘 제때 감사하지 못하고, 사람 역시 늘 곁에 있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놓치며 산다.


한동안 또 서로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목소리가 조금 달랐다. 평소의 그 사람은 말끝에 늘 웃음 같은 것이 묻어 있었고, 별일 아닌 것도 조금 재미있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날은 음성이 한 톤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깊이 묻지는 않았다.


오래된 사이에는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고, 지금은 말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것도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을 한번 같이했고, 그 한 시간 동안 우리는 그동안 비어 있던 몇 년을 빠르게 건너갔다. 서로 어디서 무슨 일을 했고, 누가 어디로 갔으며,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하나씩 이어붙이다 보니 긴 시간이 생각보다 쉽게 좁혀졌다.


어릴 적 친구를 오래 만에 만났을 때와 조금 비슷했다. 만나기 전에는 세월이 어색할까 걱정하지만 막상 얼굴을 보면 그동안 못 본 시간이 먼저 자리를 비켜주는 느낌.


그 뒤부터는 점심을 조금 더 자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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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점심 약속을 몇 주 전부터 정해두는 일이 드문 편인데, 이상하게 그 사람과는 한 달에 한 번쯤 목요일을 맞춰두었다. 일정이 생기면 다음 주로 넘기고, 부득이하면 한번 건너뛰었다. 딱히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만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해도 되는 사람이어서 만났다.


같은 회사에서 오래 살아왔으니 말의 앞뒤를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렇다고 매일 붙어 일하는 사이는 아니어서 하루의 불평을 구구절절 풀어놓을 필요도 없었다. 적당히 멀고 오래 가까운 거리. 그 정도가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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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된 어머니의 바카라장에서 글을 배웠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말과 침묵 사이에 남은 마음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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