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예술과 공예로서의 디자인

02 1부. 디자인은 왜 죽고 있는가

by이규현

2장

예술과 공예로서의 디자인


손으로 만든다는 것의 의미

대학 시절, 특별한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미국의 한 교수가 짧은 여름 기간 한국에 머물며 개설한 계절학기였다. 수강 인원은 많지 않았다. 정규 커리큘럼 사이에 끼어 있는, 학점을 채우려는 학생들이나 신청할 법한 수업이었다. 나도 큰 기대 없이 신청했다. 그런데 그 수업이 내 디자인 인생에서 가장 오래 남는 수업이 될 줄은 몰랐다.


교수는 첫날 이렇게 말했다.

"현대의 도구 중 아무거나 하나 골라오세요."

그게 전부였다. 어떤 의도인지, 무엇을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학생들은 각자 도구를 골랐다. 누군가는 가위를, 누군가는 병따개를, 누군가는 우산을 골랐다. 나는 도끼를 선택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가장 원초적인 도구처럼 보여서였던 것 같다.

다음 시간까지 그 도구를 분석해오는 것이 과제였다. 구조, 기능, 소재, 사용 방식. 나는 도끼의 날과 자루의 관계, 무게 중심, 타격 메커니즘을 정리해갔다. 도끼날의 쐐기 원리, 자루의 길이와 모멘트의 관계, 헤드의 무게와 관성. 공학 교과서를 뒤져가며 꽤 그럴듯한 분석 리포트를 만들었다. 발표를 했고,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학생들의 발표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여기까지는 평범한 수업이었다.

그리고 다음 수업에서 교수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시대 배경을 석기시대로 돌리겠습니다. 그 도구를 직접 만들어보세요."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다.

플라스틱도, 금속 가공도, 정밀 기계도 없다. 석기시대에 구할 수 있는 소재만 쓸 수 있다. 돌, 나무, 동물의 가죽이나 힘줄. 가공 방법도 그 시대의 것으로 제한된다. 돌을 돌로 깨고, 나무를 돌로 다듬고, 가죽 끈으로 묶는 것.

처음에는 황당했다. 21세기의 디자인 수업에서 석기시대 도끼라니. 그런데 재료를 구하러 다니고, 손에 돌을 쥐고 깨뜨리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조건이 좁아지자 생각이 오히려 깊어졌다.

현대의 도끼를 분석할 때 나는 완성된 답을 해부하고 있었다. 이미 존재하는 형태의 이유를 거꾸로 추적하는 일. 그런데 직접 만들려고 하자, 모든 것이 열린 질문이 되었다. 돌의 어느 면을 날로 쓸 것인가. 자루는 얼마나 길어야 하는가. 돌과 나무를 어떻게 묶어야 타격의 충격에 풀리지 않는가.

나는 도끼의 손잡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손잡이의 각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타격할 때 힘의 방향이 바뀐다. 길이가 길어지면 원심력이 커지지만 정밀도가 떨어진다. 살짝 휜 손잡이는 직선보다 충격 흡수가 좋고, 그 휨의 방향에 따라 도끼의 용도가 달라진다. 나무를 패는 도끼와 짐승을 잡는 도끼는 같은 형태가 아니었다. 분석 리포트에는 한 줄도 등장하지 않았던 것들이, 손바닥의 통증과 함께 몸으로 들어왔다.

현대의 도구 분석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직접 만들려는 순간 비로소 보였다.

그 수업이 끝난 후 나는 오랫동안 그 감각을 생각했다. 도구를 분석하는 것과 도구를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행위였다. 만드는 순간 소재가 말을 걸어왔고 — 이 돌은 이 방향으로는 깨지지 않는다고, 이 나무는 이 두께 이하로 깎으면 부러진다고 — 사용하는 사람의 몸이 설계 안으로 들어왔고, 목적이 형태를 결정했다.


그것이 디자인의 원형이었다. 적어도, 디자인이 처음 스스로를 정의하려 했을 때 붙잡은 것은 바로 그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정의의 첫 장면은 1851년 런던에서 시작된다.


기계가 세상을 바꾼 날

1851년, 런던 하이드파크에 거대한 유리 건물이 세워졌다.

수정궁(Crystal Palace)이라 불린 이 건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이었다. 길이 564미터, 유리판 30만 장. 철골과 유리로만 지어진 이 구조물은 당시 기술력의 집약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공기였다. 설계에서 완공까지 9개월. 표준화된 부품을 공장에서 만들어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이었기에 가능했다. 건물 자체가 산업혁명의 논리로 지어진 것이다.

그 안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는 산업혁명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것들을 한자리에 전시했다. 전 세계에서 1만 4천여 명의 출품자가 참여했고, 6개월 동안 600만 명이 다녀갔다. 당시 영국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증기기관, 방적기, 인쇄기. 그리고 기계로 만든 직물, 기계로 찍어낸 도자기, 기계로 복제한 가구. 빠르고, 저렴하고, 균일했다.

그리고 끔찍하게 못생겼다.

적어도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눈에는 그랬다. 당시 17세였던 모리스는 가족과 함께 박람회장을 찾았다가 입구에서 들어가기를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훗날 영국의 시인이자 디자이너, 슬롯주의자가 된 모리스에게 그 거대한 유리 궁전 안의 물건들은 진보가 아니라 타락이었다.

기계가 만들어낸 물건들은 효율적이었지만, 아름다움이 없었다. 더 정확히는, 만든 사람의 손길이 없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공산품들은 기계로 찍어내면서도 수공예의 장식을 흉내 냈다. 주물로 찍은 가짜 조각, 프레스로 누른 가짜 부조. 손의 흔적을 기계로 위조한 물건들. 모리스는 그 위조에서 시대의 거짓을 보았다. 물건 안에 인간이 없었다.

모리스는 이것을 단순한 미적 문제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것을 도덕의 문제로 봤다. 기계 앞에서 노동자는 만드는 기쁨을 잃었고, 소비자는 물건과의 관계를 잃었다. 생산과 소비 양쪽에서 인간이 소외되고 있었다. 못생긴 물건은 그 소외의 증거였다.


아츠앤크래프츠, 손의 반란

1880년대, 모리스를 중심으로 아츠앤크래프츠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이 영국에서 시작된다. 이 운동의 핵심은 단순했다. 손으로 만들어라. 만드는 사람이 의미를 담아라. 예술과 공예를 분리하지 마라.

당시 유럽의 예술 세계는 순수예술(Fine Art)과 응용예술(Applied Art)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었다. 회화와 조각은 고귀한 예술이고, 가구와 직물과 도자기는 그보다 낮은 공예였다. 화가는 아카데미에 속했고, 가구장이는 길드에 속했다. 이 위계는 산업혁명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기계가 공예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하면서, 공예는 예술에서 더 멀어졌다. 기계가 만들 수 있는 것은 예술일 수 없다는 논리가 거꾸로 공예 전체의 지위를 끌어내렸다.

모리스는 이 위계를 거부했다. 그는 일상의 물건이 예술이 될 수 있고, 아니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유용하다고 알고 있지 않거나, 아름답다고 믿지 않는 것은 집에 두지 마라." 유용함과 아름다움. 이 둘을 한 문장에 놓은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었다. 아름다운 물건에 둘러싸인 삶이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든다고 그는 믿었다.

그의 회사 모리스 마샬 포크너(Morris, Marshall, Faulkner & Co.)는 그 믿음의 실천이었다. 벽지, 직물, 가구, 스테인드글라스. 모든 제품은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자연에서 가져온 패턴을 담았고, 쓰는 사람의 삶 안에 녹아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모리스 자신이 직접 염색을 배웠고, 직조를 배웠고, 중세의 안료 제조법을 복원했다. 디자인하는 사람이 만드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이것이 디자인이 처음 스스로를 정의한 방식이었다. 기능과 아름다움의 통합. 만드는 사람과 쓰는 사람 사이의 관계. 물건 안에 담긴 가치. 디자인이라는 근대적 개념의 출생증명서에는 이 세 가지가 적혀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실패했다

아츠앤크래프츠 운동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비쌌다.

장인이 손으로 만든 물건은 기계가 찍어낸 물건보다 수십 배 비쌌다. 모리스의 벽지 한 롤은 노동자의 몇 주치 임금이었다. 모리스가 꿈꾼 아름다운 일상은 부유층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의 고객 명단에는 귀족과 신흥 부르주아가 가득했다. 슬롯주의자 모리스는 이 아이러니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직시했다. 그는 말년에 이렇게 토로했다. 나는 부자들의 돼지 같은 사치에 봉사하며 인생을 보냈다고. 노동자를 위한다고 말하면서, 노동자가 살 수 없는 물건을 만들고 있었다.

운동은 서서히 동력을 잃었다. 기계는 멈추지 않았고, 대량생산은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저렴한 물건을 골랐다. 아름다움의 이상은 가격표 앞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이 운동이 남긴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츠앤크래프츠의 사상은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 독일공작연맹(Deutscher Werkbund)에 영향을 주었고, 그 연맹은 훗날 바우하우스의 토양이 되었다. 손의 윤리는 기계의 시대에 패배했지만, 그 질문은 기계의 시대 안으로 스며들었다. 물건은 단순히 기능을 수행하는 도구인가, 아니면 그것을 만든 사람과 쓰는 사람 사이에서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인가.

이 질문은 150년이 다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지금 이 질문이 다시 살아나는 이유

AI가 이미지를 생성하고, 알고리즘이 제품을 설계하는 시대에, 우리는 이상하게도 핸드메이드/공예 시장의 성장을 목격하고 있다.

손으로 만든 도자기, 직접 짠 직물, 장인이 만든 가구. 공방 클래스는 예약이 차고, 크래프트 마켓에는 줄이 선다. 대량생산이 극에 달한 시대에, 사람들은 오히려 손의 흔적을 찾는다. 흠집과 비대칭,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결함이 아니라 가치가 된다.


이것은 단순한 복고 취향이 아니다.

사람들은 물건 안에서 사람을 찾고 있다. 누가 만들었는지, 어떤 생각으로 만들었는지, 어떤 의도가 담겨있는지. 완벽하게 균일한 것들에 둘러싸일수록, 불완전하지만 인간적인 것에 대한 갈망은 커진다. 모리스가 기계에 맞서 주장했던 그것을, 지금 소비자들이 AI에 맞서 요구하고 있다. 19세기의 기계가 손의 흔적을 위조했듯이, 21세기의 AI는 창작의 흔적을 위조한다. 그리고 양쪽 모두에서 사람들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안에 사람이 있는가.


나는 석기시대 도끼를 만들던 그 교실의 감각을 다시 떠올린다. 소재가 말을 걸어오고, 몸이 설계 안으로 들어오고, 목적이 형태를 결정하던 그 감각. 그것은 기술의 수준과 무관한, 만드는 행위의 원형이었다. 디자인이 무엇인지를 묻는 여정은 그 원형에서 출발해야 한다.


디자인의 역사는 직선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140년 전의 질문 앞에 다시 서 있다. 다음 장에서는 그 질문을 짓밟고 지나간 거대한 바퀴, 산업의 시대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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