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4,000미터에서 마주한 교통체증

[3부. 멀리 와서야 보이는 것들]

byJEN

레에 도착한 뒤 며칠 동안은 나 혼자 다른 시간대에 있는 것 같았다.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은 웃고 떠들며 거리를 채우고 있었지만, 나는 그 활기 속에 제대로 섞이지 못했다. 그런데 곰파를 다녀온 뒤부터였을까. 홀리를 생각하는 마음은 그대로였지만, 그 마음 바깥의 것들도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레를 떠나 라다크의 다른 지역도 둘러볼 준비가 된 것 같았다. 라다크에 온 목적이자, 가장 고대했던 곳 ‘판공초(Pangong tso)’로 향하기로 했다. 판공초는 해발 약 4,350m 라다크의 메마른 고원에 자리한 호수다. 인도에서 티베트까지 길게 이어지는 이 호수는 햇빛에 따라 물빛을 달리한다고 했다. 초록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황갈색 산들 사이로 펼쳐진 푸른 물. 내가 라다크까지 온 이유이자,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다려온 풍경이었다.


하루 만에 바로 판공초로 갈 수도 있었지만, 나는 중간에 몇 곳을 더 둘러보기로 했다. 여행의 시작은 해발 5,300에 위치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자동차 도로 카르둥 라 (Khardung La)를 지나는 것이었다. 고도가 올라갈 수록 몸이 이상하게 무거워졌고 귀가 먹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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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뷰포인트에 차를 세웠다. 후드티 정도로 충분했던 날씨였는데 밖으로 나가기 위해 챙겨온 패딩을 입었다.

레에서는 멀리 배경처럼 보이던 설산이 어느 순간 바로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설산을 보고 있자 자연스럽게 님스다이가 떠올랐다. 산을 특별히 좋아해본 적도, 특히나 고산을 직접 오르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한 번쯤 저 위에 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무게가 머리와 어께 위에 얹혀 있어 나를 계속 짖누르는 것 같았다. 레에서 겨우 고도가 적응됬다고 생각했는데, 이내 다시 숨이 차 오르고 머리가 지끈해졌다. 그렇게 해발 4,000미터와 5,000미터 사이를 오르락 내리락하며 몇몇의 마을 거쳐 판공초를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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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공초로 향해 잘 달리던 차가 갑자기 멈췄다. 처음에는 앞차가 잠시 서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차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을 보니 앞뒤로 차량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해발 4,000미터가 넘는 산길 한가운데서, 이유를 알 수 없는 교통체증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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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둘 사람들이 차에서 내리기 시작했고, 앞쪽을 바라보는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나도 차에서 내려 길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제야 이유를 알았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 도로 한가운데를 그대로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평소라면 차가 다니던 좁은 길이었을 텐데, 길이 마치 급류처럼 변해 있었다. 그 한가운데 차 한 대가 진흙에 바퀴를 빠뜨린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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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몇 사람만이 내려 차를 밀기 시작했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차체를 좌우로 흔들며 진흙에 박힌 타이어를 빼내려 했다. 그런데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한 명, 두 명이 더 붙더니 어느새 열 명 가까운 사람들이 차 주변에 모였다. 몇 번을 밀고 흔든 끝에 차가 겨우 진흙을 빠져나왔다. 순간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박수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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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차가 같은 곳을 지나려다 또 진흙에 빠졌다. 방금 전까지 박수를 치던 사람들 사이에서 이번에는 한숨과 탄식이 흘러나왔다. 다시 사람들이 달라붙어 차를 밀었다. 겨우 빼내고 나면 또 다른 차가 들어왔다. 그리고 또 빠졌다. 빼내고, 빠지고. 다시 빼내고, 또 빠지고. 몇 번을 반복하고 나니 다들 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오늘 안에 이 길을 지나가기는 글렀다.


그때 누군가가 산 위쪽을 가리켰다.


“아예 물길을 막아보는 건 어때?”


처음에는 몇 사람만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누군가 먼저 산비탈 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한 명, 두 명이 따라붙었다. 인도인 가족도, 외국인 여행자도, 기사 아저씨도 가이드도 함께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어느새 꽤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가 큰 돌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는 사람들은 일렬로 줄지어 섰다. 수박만 한 돌들이 한 사람의 손에서 다음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 나도 그 줄 사이에 섞여 돌을 받아 옆 사람에게 건넸다.
그토록 무질서하다고 생각했던 인도에서, 물에 잠긴 길을 앞에 두고 누구랄 것도 없이 같은 마음으로 힘을 보태고 있었다. 혼돈 한가운데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질서가 생겨난다는 것이 신기했다.


고도가 높아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찼고, 물은 발목 정도밖에 오지 않았는데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운동화를 신은 채 물속을 드나들다 보니 양말과 신발은 금세 흠뻑 젖었다. 그래도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돌을 나르며 물길을 막았을까. 산에서 내려오던 물줄기가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차를 들이밀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바라봤다. 차는 천천히 물길을 건넜다. 이번에는 바퀴가 빠지지 않았다. 그 뒤로 한 대, 또 한 대. 멈춰 있던 차들이 조금씩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한번 여기저기서 다시 박수와 환호성이 나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손은 차갑고 숨은 찼고, 양말과 운동화는 흠뻑 젖어 있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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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길을 건너, 몸을 말릴 겸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햇빛이 쨍하게 들어오는 작은 카페였다. 젖은 신발과 양말을 벗어 햇빛 아래 말려두고, 우렁찬 목소리로 뜨거운 짜이 한 잔을 주문했다.


“엑 짜이! (짜이 한잔이요!)”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앉아 있는데 기분이 이상할 만큼 좋았다. 조금 전까지 얼음장 같은 물속을 오가며 돌을 나르던 일이 마치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그제야 문득 생각했다.


"아, 나 지금 좀 신났구나."


잠깐이었지만, 홀리가 떠난 뒤 이렇게 기분이 좋아진 건 처음이었다. 그 기분이 조금은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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