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공초, 은하수 아래 도착한 편지

[3부. 멀리 와서야 보이는 것들]

byJEN

고갯마루를 넘자 그토록 기다렸던 판공초가 눈앞에 나타났다. 황량한 흙산과 자갈길 사이로 에메랄드빛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과 산, 그리고 호수가 맞닿아 선명한 수평선을 이루고 있었다.

판공초에 가까워질수록 물빛은 점점 짙은 코발트 블루로 변했다. 산중에 바다가 숨어 있는 것처럼, 그 거대하고 푸른 풍경이 압도적이었다. 다른 나라나 다른 대륙에 도착한 정도가 아니었다. 정말 같은 지구가 맞나 싶을 만큼, 낯선 행성에 발을 디딘 듯한 풍경이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보고 싶었던 풍경 앞에 드디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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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곳에는 나 혼자가 아니었다. 레를 떠난 뒤부터는 현지에서 구한 동행들과 차를 셰어해 라다크의 여러 지역을 함께 다녔다. 인도인 친구 Anubhav, 스페인 친구 Eric, 그리고 며칠 동안 우리를 태워준 기사 아저씨, Norbu까지 자연스럽게 작은 여행팀이 되었다.


동행이 된 셋은 출신도, 살아온 곳도 전혀 달랐지만 차 안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만화바카라 이야기부터 영화와 스포츠 이야기, 인도와 스페인과 한국에서 사는 이야기까지. 누군가 한 가지 이야기를 꺼내면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이야기를 보탰다.

특히 아누바브와 기사 아저씨 놀부는 힌디어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길을 가는 동안 라다크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지나가는 마을이나 산,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아저씨가 설명해주면 아누바브가 다시 영어로 하나하나 옮겨주었다. 덕분에 그냥 창밖으로 지나쳤을 풍경들이 조금씩 이야기를 가진 장소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판공초는 인도 영화 《세 얼간이》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나 역시 이곳을 그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다. 영화의 마지막, 오랜 시간을 돌아 다시 만난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미소가 지어졌다. 각자 다른 곳에서 온 세 사람이 라다크의 끝자락까지 함께 와서 별것 아닌 이야기에 웃고, 서로의 나라에 대해 묻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도 꽤 세 얼간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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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에는 별을 보기 위해 우리는 숙소 옥상으로 올라갔다. 판공초의 밤은 낮보다 훨씬 추웠다. 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 옥상 바닥에 누웠다. 고개를 들자 말도 안 될 만큼 많은 별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나는 여행을 오래 다녔고, 별이 쏟아질 듯한 밤하늘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처음 보는 풍경은 아니었다.

그런데 함께 있던 인도 친구에게는 조금 달랐다.그 친구는 이 별을 보기 위해 라다크까지 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하늘을 보니 조금 다르게 보였다. 누군가에게는 바로 이 밤하늘 하나가 먼 길을 오게 만든 이유였다.
우리는 추위에 몸을 웅크리면서도 좀처럼 옥상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별을 보고, 이야기를 하고, 또 별을 봤다. 그러다 같이 음악을 틀었다.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노래가 흘렀고, 이야기는 잠시 멎었다. 우리는 같은 노래를 들으며 저마다의 마음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때 이런 가사가 들려왔다.


저 별도 달도 사랑한 우리의 파란 하늘은
손 닿을 필요 없이 부서진 은하수인 것 같아.
우리가 머문 밤 사이 피어버린 심장 소리에
밤하늘의 별을 이어 널 그리는 걸.

— 백아,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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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들으며 하늘을 바라보다보니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스무 살 무렵, 미얀마에서 만난 스님의 싸이월드 사진첩에서 보았던 인도의 밤하늘이었다. 스님은 아날로그 카메라의 셔터를 오래 열어 별이 움직인 길을 사진 한 장에 담아두었다. 그 사진을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사진 속 인도와 비슷한 밤하늘 아래에 있었다.
카메라를 꺼냈다. 스님처럼 아날로그 카메라는 아니었지만, 나도 카메라를 고정해두고 셔터를 오래 열어두었다. 내가 잠든 사이에도 카메라는 밤새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터였다.
18년 전 사진 속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풍경 안에 내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했다. 마침 그 무렵 스님에게 보냈던 편지의 답장도 도착했다.


생각지 못하게 편지를 받게 되어 저도 기쁩니다.
아주 가끔 생각이 나곤 했지만,
어디선가 잘 지내고 계시겠지.. 하며 자애를 보내고 지나치곤 했던 것 같습니다.
(중략)
인도 북부로 여행을 가신다니, 제가 먼저 더 설레네요.
제가 출가 전에 (벌써 25년이 다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티베트에서 히말라야 고원을 넘어 네팔, 인도로 여행한 적이 있는데,
아주 최근에 (이번 생에 이 몸이 더 기력이 쇠약해지기 전에)
다시 한번 그 장소들을 순례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들곤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었나 보네요.

— 스님이 보내온 이메일 중


스무 살에 보았던 인도의 사진, 18년 만에 보낸 편지, 그리고 지금 내 머리 위에 펼쳐진 별.

그날 밤 나는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충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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