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같은 자리

by고혜정

누군가 세월의 시간을 어떻게 채우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오래된 친구들을 떠올릴 것 같다. 시간은 참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다.

입었던 교복은 사라지고, 눈부시던 교실도 멀어졌으며, 각자의 이름 앞에는 엄마와 아내, 온라인 게임인과 은퇴자 같은 새로운 호칭들이 하나둘 붙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계절을 걸어오다가도, 가끔 한 자리에 모이면 시간은 신기할 만큼 천천히 흐른다.

올해도 우리는 새해를 맞아 친구 집에 모였다. 따뜻한 온기가 담긴 음식을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지난 한 해 동안 지나쳐 온 크고 작은 일들을 천천히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손주의 사진을 보여주고, 누군가는 여행길에서 만난 풍경을 들려주었다. 이제는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고백도 대화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젊은 시절에는 다가올 날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면, 지금은 지나온 세월을 차분히 꺼내놓는 일이 대화의 큰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다고 해서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무거워지지는 않는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가 한참 깊어질 즈음, 누군가 손때 묻은 익숙한 상자 하나를 꺼낸다.


‘렉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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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타일들이 탁자 위에서 사각사각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모임이 비로소 시작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잠시 후 누군가 첫 타일을 내려놓으면 방 안의 공기가 이내 유쾌하게 달라진다. 웃음이 터지고, 작은 탄성이 이어지며, 아쉬운 표정 하나에도 모두가 다 함께 웃는다.


이기고 지는 것은 금세 잊힌다. 대신 누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누가 엉뚱한 타일을 끝까지 품고 있었는지를 두고 몇 번이고 다시 이야기하며 웃음꽃을 피운다.

우리는 여행을 떠날 때도 이 작은 상자를 캐리어에 넣는다. 낯선 도시의 숙소에서도, 타일을 펼쳐 놓으면 그곳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공간처럼 편안해진다.


‘사각사각’

타일이 부딪히는 그 익숙한 소리는 흘러간 시간까지 다시 우리 곁으로 불러온다.

언젠가는 타일을 집어 드는 손이 조금 더 느려질지도 모른다. 게임 규칙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 날도 찾아올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게임의 속도는 조금 느려질지라도,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이유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을 테니까.


앞으로도 우리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누군가의 집 식탁에 둘러앉아 작은 검은 타일들을 펼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오래전 교복을 입었던 여고생도, 지금의 나이도 모두 잊은 채,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웃음을 나누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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