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주가 되고 통장 보기가 두려워진 이유

by까꿍


바쁜 와중에도 일상은 쉼 없이 흘러갔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은행잔고를 보는 게 두려워졌다는 것이다. 대출이자가 말도 못 하게 훅! 하고 나간 뒤, 며칠 만에 말도 안 되는 작은 월세가 입금되었다. 의도가 좋아 시작했지만, 현실은 시베리아였다. 아무리 아껴도 안 되었다. 월세는 그저 한 줄기의 빚이 아닌, 짠 하고 사라지는 다이소 불꽃과 같았다.


벌써 20년 넘게 이 건물에 살고 있다던 세입자는 주인이 바뀜과 동시에 위층세대로 이사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가격도 정해진 바 없고, 수리도 안 되어 있는데 일단 올라오고 싶다는 의견을 줬기에, 수리 후 다시 얘기해 보자고 하던 터였다. 그런데 어느 날 살던 곳에서 계속 살아야겠다는 세입자의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고시원에서 원룸과 빌라를 거쳐 지금 건물까지 경험했다. 내 초본은 이사를 하도 많이 다닌 탓에 이미 세 장이 된 참이었다. 세입자였다가 갑자기 집주인이 되었는데, 감정에 녹아들 틈도 없이 일상은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맛있는 간식을 한 박스 사들고 문 앞에 내걸어 두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와 회사일은 회사일대로, 건물 수리는 건물 수리대로 해치워야 했다. 바쁜 나를 대신해 남편이 많은 부분을 감당해 주었다. 예산에 맞는 설비업체를 찾고 또 찾았다. 동네 철물점에 가서 번호를 받기도 하고, 맘카페를 뒤지기도 했다. 셀프 인테리어로 유명한 분들은 인건비가 너무 비쌌다. 이전에 설비와 철거를 해준 분들이 계셨지만, 결과물이 별로였거나, 인건비가 너무 올라 감당 불가할 정도가 된 분들을 제외했더니 남은 분들이 별로 없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다행히 여러 번의 공사 끝에 어느 정도 사람을 보는 눈이 생겼고 (여보세요 한 마디만 해도 상대방이 그려지는 지경) 거칠지만 인간미가 있는 분들로 공사 인원을 꾸리게 됐다. 부드럽지만 인간미도 없는, 마치 챗 gpt의 ’ 다정한 모드‘ 챗봇 같은 분들은 제외했다.


아 징글징글한 인테리어, 이제 그만해야지 10년 동안 인테리어 4번은 너무 심했다. 심지어 본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인테리어에 대해선 할 말이 많다. 10년 전부터 셀프 인테리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나를 본 사장님들은 처음엔 새댁이었다가, 취직이 되지 않아 울고 있는 백수였던 나였다가(내가 얼마나 우는 소리를 했는지 도배 시다부터 시작하겠냐고 권유했던 분도 계셨다), 취직 후 애가 하나인 나였다가, 이젠 삶과 육아에 찌들어있는 애 둘인 나를 보며 허허 웃으셨다. 내가 이래서 작업자분들을 좋아한다. 애를 낳았다고 한우를 보내주셨던 통 큰 사장님, 아이들을 보자 만원씩 건네주던 사장님, 이건 어때요?라고 묻자 ‘그 제품은 쓰레기예요’라고 솔직하게 대답해 준 사장님 등등… 그분들과의 대화가 너무 즐거웠다. 회사에서 하지 못하는 돈 얘기와 인생 얘기를 맘껏 했고, 어디가 돈이 되더라 라는 카더라 고급 정보도 얻었고, 무엇보다 회사 밖의 삶에 대해 간접체험을 할 수 있어서 작업이 늘 즐거웠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가 바빠서 그들과 작업을 못 하게 된 것이었다. 회사를 다녀야 하니 어쩔 수가 없다. 그분들의 며칠이, 내겐 한 달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분들을 계속 보려면 내가 월급을 받아야 했다. 작업자 분들께 작업을 맡기고 일당을 드리기 위해 회사에 출근하는 삶.



회사 다니랴, 애들 돌보랴, 공사까지 해야 하는 탓에 애들에겐 정서적인 펑크가 났고, 이자 감당하랴, 회사 일하랴, 결국 남편의 건강에 펑크가 났고, 그 길로 남편의 첫 육아휴직이 시작됐다. 미안하지만, 남편의 휴직 후에야 제대로 된 공정이 시작됐다. 남편은 아침 일찍 집에 가서 공정 진행사항을 체크하고 작업자들과 함께 있다가 하원을 하며 애들과 시간을 보내며 나의 퇴근을 기다려줬다. 남편은 힘들다고 아우성이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일은 넘쳐났고 오더는 밀물처럼 밀려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결정장애의 절정을 달리던 나는 나대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인테리어 자재는 한 번 붙이면 되돌릴 수 없기에, 내 머릿속에 충분한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후에 자재를 정하곤 했는데, 시간에 쫓겨 충분히 고민하지 못한 채 선택하고 취소하고 번복하고, 지난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아이가 없을 때, 결정장애의 끝판왕을 달리던 어느 날 방산시장에 장판을 고르느라 세 번 이상 간 적이 있었다. 장판가게 영업사원이 내게 물었다.


“저, 진짜 손님한테 이런 얘기 안 하거든요? 그런데 손님은 진짜 궁금해요, 대체 뭐 직업이 뭐예요? 저 한 번만 알려주시면 안 돼요? “


지금 이 자리를 빌려 그분께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평일 오후였다. 계단 사이에 뭔가 껴 있었다. 동사무소에서 보낸 공청회 초대장이었다. 말이 너무 어려워 내용은 모르겠고, 토지 무슨 공청회 이 하나 단어만으로 갑자기 모든 피로가 싸악 풀리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갑자기 어디선가 힘이 솟기 시작했다. 공청회라니, 공청회라니!!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