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태교는 공인중개사 공부였다

합격증은 장롱 속에서 10년째 먼지가 쌓여갔다

by김온유

"사법시험 폐지, 로스쿨 체제로 전환."

뉴스 자막을 보는 순간, 나는 젓가락을 든 채로 얼어붙었다. 그동안 쏟아부은 세월이 있는데, 이 시험 자체가 없어진다니. 독서실 그 좁은 자리에서 보낸 밤들, 헌바카라방에서 사 온 밑줄투성이 문제집들, 그 모든 시간이 갑자기 허공에 붕 뜬 것처럼 느껴졌다.

설마 했던 걱정은 내 바람과 상관없이 현실이 되었다. 사법시험은 그렇게 폐지의 길로 들어섰다. 뜨거웠던 나의 20대를 고스란히 품은 채로.


결혼을 앞둔 나는 더 이상 수험생으로만 머물 수 없었다. 무엇이든 일을 시작해야 했다. 법학을 전공했으니 이력을 살릴 수 있는 곳을 찾다가 들어간 곳이 ‘00옥션’ 작은 부동산 경매회사였다. '그래도 전공은 살리는 거네.' 처음에는 꿩 대신 닭이라는 아쉬운 마음으로 출근했는데, 막상 다녀 보니 뜻밖에 재미있는 세계였다.


그런데 일을 할수록 보이지 않는 선 하나가 느껴졌다. 경매 물건을 분석하고 고객에게 설명하는 일은 할 수 있었지만, 매매 계약서를 쓰는 중개는 자격증 없이는 손댈 수가 없었다. 일이 재미있어질수록, 그 선 앞에서 번번이 멈춰 서야 했다.

"팀장님, 저도 매매 계약서 한번 써봐도 돼요?."

"자격증 있어?"

"...없는데요."

"그럼 공인중개사부터 따 봐. 그다음엔 내가 계약서 쓰는 거도 가르쳐 줄게."

그 짧은 대화가 결심의 계기가 됐다. 사법시험이라는 큰 배가 가라앉은 자리에서, 나는 공인중개사라는 작은 배에 올라탔다.


그렇게 마음먹은 게, 하필 첫째를 임신했을 때였다.

"이 몸으로 시험을 본다고?" 남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 배 속 아기랑 같이 보는 거지 뭐. 둘이 보면 덜 떨리겠다."

"그래도..."

"나 이거 하고 싶어, 아니, 해야 돼."


남편은 더 묻지 않았다. 내 표정을 보고 알았던 것 같다. 말려도 소용없다는 걸.

입덧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바카라을 펼쳤다. 남들은 태교라고 하면 클래식을 틀어 놓거나 그림바카라을 읽는다는데, 나는 배를 쓰다듬으며 민법 조문을 읽었다. "제104조, 불공정한 법률행위..." 배 속 아이가 발로 툭 차면, "그래, 응원하는 거지?" 하고 더 생각했다.


1차 시험 날, 나는 만삭이었다. 감독관이 내 배를 한 번 보고, 얼굴을 한 번 보고, 다시 배를 봤다. 그러고는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힘드시면 언제든 손 드세요. 무리하지 마시고요."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이제 아이가 언제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을 며칠 전 진료실에서 들은 터였다.

의자를 있는 힘껏 뒤로 빼고, 배를 두 손으로 감싸 안은 채 문제를 풀었다. 중간중간 아이가 세게 차는 태동을 응원이라 생각하면서 마지막 문제까지 힘을냈다. 시험장을 나오며 배를 토닥이며 말했다.

"고생했다, 우리."


한 달 후, 첫째가 태어났다. 그리고 또 1년 후, 이번엔 2차 시험이었다. 첫째의 돌잔치를 코앞에 두고서 시험을 보러가야 했다. 돌잡이상에 공법바카라이라도 올려야 하나 고민 해가며 돌잔치와 시험을 함께 준비했었다.

이 시기의 나는 아이가 잠들기만을 기다리는 엄마였다. 젖을 먹이고, 트림시키고, 조심조심 눕히고 나면 겨우 30분에서 한 시간. 방문을 살짝 열어 놓고 아이 숨소리에 귀 기울이며 바카라장을 넘겼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뒤척이면 심장이 철렁했다. "제발, 조금만 더 자 줘..."


게다가 첫째는 분유에 알레르기가 있는 체질이었다. 나중에 태어난 둘째까지 똑같았다. 그래서 두 아이 모두 꼬박 14개월씩, 오로지 모유로만 키웠다.

"어머니, 이 아이는 당분간 모유 외엔 답이 없어요." 소아과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선생님, 저도 답이 없는데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얘기다. 내 몸이 이 집 아이의 유일한 우유공장이었던 셈이다. 그것도 24시간 영업에, 휴무도 야근수당도 없는.


발표 날, 화면에 뜬 "합격을 축하합니다"라는 문구를 보고 나는 소리 없이 눈물이 났다. 옆에서 아이를 안고 있던 남편이 말했다. "고생했어." 그날 우리는 웃으면서, 동시에 울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합격증이 곧바로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주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를 임신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격증은 장롱 속으로 들어가 조용히 먼지가 쌓여갔다. 그 먼지가 10년이나 쌓이게 될 줄은,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본격적인 육아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에는 계속 미련이 남아 있었다. 사법시험은 이미 폐지되고 로스쿨 체제로 넘어간 뒤였다. 그런데도 나는 젖먹이 아이 둘을 키우며 여전히 시험이라는 문 앞을 서성거렸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고 아이를 재운 밤마다 로스쿨 입학시험 바카라을 펼쳤고, 그렇게 원서를 낸 것만 3년쯤 된다.


"그렇게 시험을 지겹도록 치고도 또 시험을 보고 싶어?" 남편이 물은 적이 있다.

어쩌면 이제 '그만해도 돼'라는 말을 돌려 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글쎄... 그냥 여기서 멈추면 억울할 것 같아서."


결과는 매번 불합격이었다. 팔팔한 20대와, 밤잠 설치며 젖먹이 아이 둘을 키우는 30대 아줌마가 경쟁이 될 리 없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해마다 원서를 넣었다.


그 시절의 나는 참 이상한 자리에 서 있었다. 육아는 육아대로 지쳐 가는데, 정작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찾지 못한 채였다. 공인중개사 자격을 손에 쥐고도 써먹지 못한 채, 이루지 못한 꿈 언저리를 맴돌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그렇게 매달렸던 건 시험 그 자체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뭔가를 "붙잡고" 싶었다. 아이를 키우는 하루하루가 소중하면서도, 동시에 "나"라는 사람이 조금씩 흐려지는 게 두려웠다. 시험은 어쩌면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나 아직 여기 있어. 나 아직 뭔가 해낼 수 있는 사람이야." 그걸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거다.


그 증명은 결국 시험 합격이라는 형태로 오지 않았다. 대신 훨씬 늦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왔다. 지금 와서 보면 그 10년의 방황도 무언가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조급하게 채근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지나고 나서야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그로부터 10년 뒤, 그 낡은 자격증을 다시 꺼냈다. 먼지를 한 번 슥 닦아 내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그래, 너도 참 오래 기다렸다." 그 종이 한 장이 나에게 준 건 자격이 아니었다. 그 시절의 내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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