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섬이란다

리빈이와의 첫 만남

by김지연

다행히 세상에 나를 소리칠 일은 없었다. 보증공사에서 무사히 돈을 돌려받았기 때문이다.


회사도 정리되고 집 문제도 정리되니 나는 아무 데도 속한 데가 없었다. 집 문제로 하도 골머리를 썩어서일까, 집 없고 속한 곳도 없다는 게 막막하기보다는 자유롭게 느껴졌다.


달팽이의 마음으로 싸놓은 배낭을 메고 오랫동안 꿈꿔왔던 여행길에 올랐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그저 파리행 편도 티켓을 끊고 운명의 흐름에 나를 맡겨볼 생각이었다. 난 자유니까.


내가 첫 번째로 가고자 했던 목적지는 산티아고 순례길 Camino Francés

프랑스 남부 국경에서 시작해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약 800km 정도를 걸어가는 길이었다.

프랑스에서 시작할 거니까 파리로 입국하는 항공권을 샀는데, 언제 어디서 돌아올지 아직 몰라서 출국편만 샀다.


기분 좋게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맡기고 체크인을 하려는데 생각지 못한 복병이 있었다. 왕복 항공권이 아니라서 내가 프랑스에서 다른 국가로 이동하는 교통편을 증빙하지 않으면 티켓을 줄 수 없다는 거다.


근데 나는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바로 남부로 내려가서 걸어서 국경을 넘을 거였다.

그렇게 얘기했더니 승무원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걸어서 스페인까지 가신다고요?!?!?”

어 네.. 그 산티아고 순례길 가는 건데요


“순례를 하신다고요?! 종교인이신거예요? 잠시만요?”

하더니 내 여권이랑 티켓을 들고 상급자한테 달려갔다.

근데 그분이 거기 가서 설명을 하더니 거기서 상급자도 같이 또 놀라고 잇다.


“뭐?! 순례??”

아 왜 저래

다시 돌아오더니 잠시 더 확인이 필요하다면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지금 승객분께서 파리에서 걸어서 스페인으로 가신다는데…”

아니, 아니거든요?...


'퇴사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이 이렇게나 흔한 마당에 이런 일을 겪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나 때문에 갑자기 비상이 걸려서 머쓱한 마음 플러스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그 자리에서 프랑스에서 제일 가까운 다른 나라로 가는 버스 티켓을 사서 증빙하고 겨우 티켓을 받아 들었다.


게이트로 가서 기다리는 동안은 회사생활 할 때 제일 자주 걸던 전화번호인 퀵 업체 단축번호를 삭제했다.

번호를 저장하던 순간까지도 너무 급해서 '퀵'이 아니라 '쿽'이라고 저장해 놓고도 수정할 수고를 들이지 않았던 그 버튼.


복잡한 세상에서 벗어나서 아무도 나를 모르는 자연 속에서 계속해서 걷고 매일 같은 곳을 향하는 친구들이 있는 곳, 까미노 데 산티아고. 그곳에 가서 걷다 보면 바쁜 삶에 밀려 언젠가부터 사라져 버린 사랑하는 마음, 인간성 같은 걸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데 막상 길을 걸으면서는 오히려 그것들의 부재를 더 자주 느껴서 씁쓸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도착해서 펑펑 우는 사람들을 보고 나도 뭔가 나오려나? 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고 머쓱하게 남들이 우는 것만 실컷 구경했다.


많이 우네... 힘들었나?


어렸을 땐 감수성 충만한 어린이, 생각이 깊은 청소년이었던 거 같는데 이제 현실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 씁쓸한 비관만 쿨럭쿨럭 뱉어내는 회색인간이 된 거 같았다.


걷는 동안 사랑이 많은 맑고 투명한 영혼의 사람들 속에 섞여 힘을 얻고 즐거워하면서도 한편으로 끊임없이 벗어나고 싶어 했다.


순례가 끝나면 나처럼 멀리서 온 사람들은 마치 그렇게 된 패키지인 것처럼 꼭 포르투를 여행하고 갔다.


나는 포르투가 정확히 어디 붙어있는 곳인지도 몰랐지만 좋아하는 포트와인이나 잔뜩 마시고 서핑이나 할 요량으로 사람들을 따라 포르투행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저렴한 남녀공용 다인실 호스텔과 와이너리 투어, 서핑 장비까지 야무지게 예약했는데 호방하게 예약한 것 치고 포르투에 도착하자마자 속이 안 좋아져서 며칠간 숙소 이층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가볍게 인사만 나눴던 옆침대 열아홉 살 리빈이는 원래 다음날 새벽에 버스를 타고 떠날 예정이라고 했지만 어쩐 일인지 내가 늦게 일어났는데도 아직 호스텔에 있었다.


"어? 아직 안 갔네?"

"응, 왠지 모르겠는데 기사님이 자전거를 안 태워준다네..."


좌석 티켓은 물론이고 자전거 티켓까지 야무지게 미리 예매해 둔 버스에서 왠지 억울하게 승차거부를 당해 하루를 더 묵어야 하게 됐다고 했다. 뭐 그렇게 된 건 알겠고 끼니부터 걱정하는 한국인인 나는 일단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니니? 하며 찾아둔 한식당이나 같이 가자고 했다.


리빈이는 독일 집에서부터 거기까지 자전거를 타고 왔다고 했다. 하필 자전거를 타고 온 이유를 물어보니 여행을 좋아하는데 비행기를 타서 탄소를 발생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고 했다. 원래는 자전거를 타고 일본까지 가는 게 목표였는데, 우선 예행연습으로 포르투까지 왔다고 했다.


... 갓 고등학교 졸업한 애가 유럽 밖에 나와본 적이 없어서 정말 유럽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나? 혹시 지구 평평론을 믿는 거 아닐까?


“일본? 너 일본이 어디 있는지 아는 거 맞아? 거긴 섬이야, 자전거 타고는 못 가.”


그러자 뜻밖에도 리빈이는 기다렸다는 듯 생각해 둔 구체적인 플랜을 이야기했다.


“응,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자전거로 가고, 여기부터는 사막이라 여기서 식량을 비축해서 며칠 안에 통과해야 해. 여기는 육로 입국이 안 돼서 이리로 우회할 거야.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배를 타고…”


내가 얕잡아 본 이 지리 덕후는 일본이 섬이라는 걸 아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 그래그래, 알겠어. 다 계획이 있는 거였구나? 아무튼 탄소 발자국을 줄이려고 그랬다고?……”


리빈이는 다음날 새벽에 다시 예매한 똑같은 버스 편을 타고 무사히 떠날 수 있었다. 리빈이는 떠났지만 리빈이의 얘기는 신선한 충격으로 며칠간 내 마음에 머물렀다.


나름 환경이슈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생각했는데, 우리나라가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육로가 고립된 섬나라 같은 처지여서였을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나라에 가려면 무조건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걔의 말은 다음 목적지였던 영국에서 비행기가 아닌 배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게 만든 영감이 되었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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