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에 온 지 2년 반
평일 아침 8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돌로 깎은 아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너머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사람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아치 한쪽에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Izpit iz slovenščine.
슬로베니아어 시험. 2층.
입구 한쪽에서는 중년의 여성이 응시자들의 이름과 신분증을 확인하고 있었다. 차례가 되어 비자 카드를 내밀고 이름을 말했다. 확인을 마친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Srečno!"
행운을 빈다는 말이었다.
슬로베니아에 온 지 2년 반. 나는 결국 이 나라 언어의 시험장까지 걸어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길에서 마주쳤다면 모두 슬로베니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얼굴들. 적어도 외형만으로는 누가 외국인이고 누가 현지인인지 전혀 구분되지 않았다. 그 틈에서 동양인은 나 하나였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가장 눈에 띄는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시험장에 온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가벼운 가방과 적당히 꾸민 차림. 한국에서라면 마지막까지 바카라이나 프린트를 들여다보는 풍경이 더 익숙했을 텐데, 이곳은 어딘가 평소의 하루처럼 보였다.
사실 한국에서도 외국어 시험을 본 경험은 거의 없었다. 영어 시험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한국어와 한국사 시험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슬로베니아의 한 대학 건물 안에서 슬로베니아어 시험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이 나라에 왔을 때를 생각하면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알파벳조차 낯설었다. 가게에서 인사 한마디 하는 것도 긴장이 됐다. 버스를 타는 일도, 택배를 받는 일도, 카페에서 주문하는 일도 작은 도전처럼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시험은 이틀에 걸쳐 진행됐다. 첫날은 읽기, 듣기, 쓰기. 둘째 날은 말하기였다.
첫날, 시험 시간이 다가오자 교실 문이 열렸다. 교실이라기보다 작은 공부방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교실마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았다. 다들 자기 앞 바카라상만 보거나, 펜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감독관은 슬로베니아어로 안내 사항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알아듣는 단어도 있었고, 흘려보내는 문장도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을 말들이었다.
처음으로 슬로베니아어 수업 교실 문을 열던 날.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그만두고 싶었던 날. 언어를 배웠다기보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말이 하나씩 몸에 붙어 갔다는 쪽이 더 맞을지 모른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자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둘째 날 말하기 시험은 조금 달랐다. 면접관 셋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었고, 내 옆에는 우크라이나 여성 한 명이 함께 앉아 있었다.
3대 2. 생각보다 긴장되는 구조였다. 각자 다른 종이 한 장이 앞에 놓였다.
자기소개. 사진 설명. 상황극.
옆 사람이 먼저 시작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외워 둔 문장들을 되뇌고 있었다.
Na sliki je oseba.
Na sliki sta osebi.
Na sliki so osebe.
한 명이면 이렇게. 두 명이면 저렇게. 세 명이면 또 달라진다.
동사도 바뀌고 명사도 바뀐다.
그런데 막상 더 어려운 건 따로 있었다. 사진 속 장면을 보고 그 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했다. 누구와 어떤 관계인지, 왜 그곳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짧은 시간 안에 장면을 상상하고, 그 이야기를 슬로베니아어 문장으로 옮겨야 했다.
생각해 보면 한국어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험을 본다기보다 기억해 둔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 붙이는 기분에 가까웠다.
상황극 차례가 왔다. 면접관이 가상의 상황을 제시하며 말을 걸어왔다. 이웃의 초대에 응해 집을 방문한 상황이었다. 면접관은 집주인 역할이었다. 와 줘서 고맙다는 인사로 대화가 시작됐다. 무엇을 마실지, 무엇을 먹고 싶은지,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집주인의 질문이 이어졌다. 나는 초대받은 손님이 되어 답해야 했다.
한국어라면 어렵지 않은 대화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슬로베니아어로는 달랐다. 머릿속에서는 문장을 만드는 것보다 먼저 동사 활용과 단어들이 떠올랐다. 이 말이 맞는지, 격은 제대로 붙었는지, 시제는 틀리지 않았는지. 그래도 면접관이 이끄는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완벽하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문법도 틀렸을 것이다. 발음도 어색했을 것이다. 그래도 끝까지 말을 이어 갔다.
시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이미 점수를 위해서만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었다. 언어를 얼마나 잘하는지 증명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처음 슬로베니아어 알파벳을 더듬던 사람이, 이제는 낯선 사진 속 이야기를 만들고 누군가와 상황극을 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먼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