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를 싫어하지 않았다. 비가 내리면 마당의 흙빛이 달라지고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이 작은 물길을 만들었다. 평소와 다른 흙냄새가 났고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도 좋았다. 며칠 동안 비가 오지 않다가 하늘이 어두워지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의 방향이 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비가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했다. 하늘에는 물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저렇게 많은 물이 떨어지는지, 비가 오는 날과 오지 않는 날은 무엇이 다른지, 비가 그친 뒤 마당에 고인 물은 시간이 지나면 어디로 사라지는 지도 알고 싶었다.
당시에는 날씨를 미리 알려주는 방법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우리 집에는 라디오도 없었다. 어른들은 하늘과 바람을 살피며 날씨를 짐작했다. 멀리 산 위로 구름이 걸리면 비가 올 것이라고 했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날씨가 달라진다고 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른들은 무엇을 보고 비가 올 것을 알아차리는지 궁금했다. 비는 그렇게 내게 하나의 궁금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비를 좋아하기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름에 비가 많이 내리면 논과 밭이 잠겼다. 평소에는 눈에 보이던 논두렁이 물속으로 사라지고 길과 논의 경계도 흐려졌다. 강물이 넘치면 주변의 논까지 물이 들어왔다. 집은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서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아래쪽의 논과 밭은 강물이 범람할 때마다 물에 잠겼다.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비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논과 밭이 말라버렸으니 기다리던 비가 내리면 반가웠다. 하지만 필요한 물과 감당할 수 없는 물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었다. 가을을 앞두고 태풍이 올라오면 걱정이 커졌다. 봄부터 씨를 뿌리고 모를 심고 밭을 돌보며 흘린 시간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태풍이 지나간 뒤 논에 나가보면 벼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은 손으로 세웠지만 물에 떠내려가거나 상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 해 동안 흘린 땀이 며칠의 비바람으로 흔적처럼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강물이 불어나면 더했다.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을 본 적도 있었고 소가 강물에 떠밀려 오는 경우도 보았다. 평소에는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고 돌볼 수 있던 사람과 가축이 거센 물 앞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물이 빠지고 나서야 무엇이 남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자연의 힘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작은 지를 보았다.
중학교에 다닐 때 그런 일을 직접 겪었다. 학교와 집은 9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평소에는 버스를 타고 다녔고 자전거를 이용하기도 했다. 걸어서 간다면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지만 매일 오가는 길이라 논과 밭 사이로 이어지는 길의 모양은 눈에 익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나섰을 때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홍수로 논도 밭도 모두 물에 잠겼고 강물이 넘치면서 평소의 길까지 삼켜버린 것이다.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논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잠시 서 있다가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카라가방을 머리에 올리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그리 깊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허리춤까지 올라왔다. 발밑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버스나 자전거로 지나던 길을 그날은 두 발로 더듬듯 걸어야 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물살이 다리를 밀었다. 바카라가방을 머리에 올리고 있어서 두 손을 마음대로 쓸 수도 없었다. 그래도 집이 있는 방향을 향해 걸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시계를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물이 조금씩 낮아지면서 지대가 높은 곳에 올라섰고 그제야 물에 잠기지 않은 길이 보였다. 길이었다. 발밑이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지만 집까지는 아직 거리가 남아 있었다. 다시 걸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가 나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우셨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내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이 조금 실감 났다. 나는 그때 어머니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했다. 홍수가 났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 돌아오면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고 나는 평소처럼 내가 할 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날 어머니가 흘리던 눈물이 가장 오래 남는다.
그날 이후 비를 바라보는 마음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가 함께 자리 잡았다. 비는 논과 밭에 필요했지만 너무 많은 비는 길을 삼키고 농작물을 쓰러뜨렸다. 강물이 넘치면 사람과 가축까지 떠내려갔다. 같은 물인데도 필요한 때에는 생명을 살리고 넘치는 순간에는 사람의 힘으로 막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어릴 때 나는 비가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했다. 구름 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비가 그친 뒤 물은 어디로 가는지도 알고 싶었다. 홍수를 겪고 나서는 궁금한 것이 조금 달라졌다. 얼마나 많은 비가 내리면 길이 사라지는지, 물은 어떤 곳으로 흘러가는지, 같은 비를 맞아도 어떤 곳은 잠기고 어떤 곳은 괜찮은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논과 밭의 높낮이도 전과 다르게 보였다.
자연은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저 보여주었다. 물이 차오르면 길이 사라졌고 지대가 높아지면 다시 길이 나타났다. 비가 필요한 만큼 내리다가 어느 순간 감당하기 어려운 물이 되기도 했다. 무서운 것도 오래 바라보면 궁금해졌다.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알고 싶었다.
그때부터 비가 오면 나는 하늘만 보지 않았다. 물이 흘러가는 방향을 살피고 논과 밭의 높낮이를 바라보았다. 같은 비를 맞으면서도 어떤 곳은 물에 잠기고 어떤 곳은 괜찮은 이유를 생각했다. 비를 이해한다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만 보는 일이 아니라 그 물이 땅에 닿은 뒤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살피는 일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비에 대한 궁금증은 비의 원리를 아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한 번 더 바라보게 만들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물이 땅에 닿은 뒤 어디로 가는지, 그 물이 사람들의 삶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보게 했다.
비가 오면 궁금한 것이 생겼다.
그리고 비가 그친 뒤에도 그 궁금증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