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
"빵… 나… 왔습니다. 빵… 사… 세… 요."
20대 초반, 친구의 소개로 며칠 동안 마트 안 작은 빵집에서 대타로 일한 적이 있다. 가게가 작아서 사장님이 특별히 지시한 일은 없었다. 딱 하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빵 사세요!"라는 말을 크게 외쳐달라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그 말이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홍보 멘트가 오글거리기도 하고 낯간지럽기도 했다. 몇 마디를 수줍게 외치다 보면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됐다.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남들 앞에서 말하거나 나서는 일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판매원의 입장에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큰 소리로 상품을 홍보하는 일은 어색했다. 그때는 막연하게 영업이라는 직무가 나와 맞지 않을 거라고만 느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첫 온라인 게임은 대기업 유통사의 매장 영업직이었다. 직무에 대해 대략적인 상상은 했지만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지는 잘 몰랐다. 오래전 빵집에서의 기억은 잊은 채, 나는 훨씬 더 큰 목소리를 내야 하는 현장에 놓이게 됐다.
입사 후 선배가 처음 내부 방송을 알려주겠다며 핸드 마이크를 들었다. 할인 행사를 홍보하는 시범을 보여주더니 곧바로 내게 대본을 써서 해보라고 했다. 타임 세일, 할인 상품, 구매 혜택. 고객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문구를 빠르게 작성해야 했다. 그렇게 만든 몇 줄의 멘트로 80평 매장을 내 목소리로 채워야 했다. 마이크 너머로 들리는 어색한 내 목소리가 낯설었다. 하지만 어색하다고 피할 시간도 없이 상황은 시작됐다. 처음에는 대본을 보며 겨우 방송을 했다. 그런데 내 방송을 듣고 고객들이 상품을 문의하기 시작했고, 매장 분위기가 활기를 띠었다. 방송을 통해 고객의 반응이 달라지고 매출에도 영향을 주는 모습을 직접 확인했다.
그 순간부터였을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먼저 마이크를 잡기 시작했다. 어느새 방송 멘트를 만드는 일이 익숙해졌고 대본을 작성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다양한 멘트를 뽑아낼 수 있었다. 더불어 매장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매장 밖으로 나가 제품을 흔들며 행사를 알리기도 했다. 한때는 그렇게 부끄럽고 낯간지러웠던 일이 어느새 내가 자신 있게 해낼 수 있는 무기가 되어 있었다. 막연히 나와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오히려 나의 강점이 된 것이다.
"확실히 E이신가 봐요."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종종 나를 외향적인 사람으로 생각한다. 실제 MBTI 검사에서도 외향성 51%, 내향성 49%로 거의 반반에 가깝다.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는 주변을 살피며 말을 아끼는 편이다. 반면 소수의 사람과 대화하거나 내가 상황을 이끌어야 할 때는 먼저 말을 건네고 대화를 주도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아마 일을 하면서 성향과 관계없이 나서야 할 때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이 외향적인 인상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슬롯생활을 하면서 사람들 앞에 나서고, 먼저 말을 걸고, 상황을 주도하는 행동은 내가 원하는 방향이기도 했지만 훈련의 영역이 컸다. 해야 하는 일을 해내는 과정에서 낯선 행동이 익숙한 행동으로 바뀌었다. 완전히 성향과 적합하다고 보긴 어렵지만 일부를 흡수하는 것이 어렵지도 않았다. 적성인듯 아닌듯 자연스럽게 내 몸에 축적되었다. 다만 혼자 있는 시간,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무척 중요하다. 가까운 사람들은 내가 생각보다 조용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모습에 의외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성향에 맞는 일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흥미, 적성 검사를 기반으로 직업을 선택해야한다고 한다. 물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사전에 아는 것은 직업을 선택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다. 하지만 때로는 일을 하면서 흥미, 적성, 능력을 알게 되기도 한다. 나의 성향이 일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일이 나의 성향을 조금씩 바꾸기도 한다.
흥미 뿐만 아니라 적성이 받쳐줘야 일할 수 있다곤 하지만 배우는 과정에서 반복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어느 순간 나만의 강점이 되기도 한다.
빵집에서 작은 목소리로 '빵 사세요'를 소심하게 외치던 내가 매장 전체에 울리는 방송을 즐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의 나는 내가 어떤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어쩌면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기준도 경험이 부족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는지 모른다. 나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때로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을 직접 해보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