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타이밍

절실함

by계발자

3년 전 야심 차게 도전했던 직무 전환 이직을 한 달 만에 정리하고 나니 커리어가 끝난 것 같았다.


직전 회사에서는 부품처럼 1분 단위로 일했고 바쁘게 움직이며 수많은 일을 해냈지만, 막상 그 경험을 내 것으로 정리해 이력서로 어필하지 못했다. 얼추 10년의 경력을 쌓았는데도 나만의 커리어 코어는 자리 잡지 못한 것 같았다.


번번히 면접까지 가서 불합격을 하다보니 20대에는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던 취업 컨설팅 업체를 30대가 넘어서야 찾아갔다. 이제는 나이도 있으니 더 이상 방황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래 다닐 수 있는 온라인 게임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컸다. 상담을 진행한 곳에서는 300만 원을 지불하면 취업할 때까지 이력서 작성부터 면접까지 지원해 준다고 했다.


10분 남짓한 짧은 통화였지만 대표의 자신감은 명확했고 취업 시장의 흐름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은 사라진 나의 첫 회사, 업계 동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어느새 취업의 신을 만난 것 같은 믿음이 생겼다.


당시 나는 매일 채용공고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온오프라인 유통부터 온라인 데이터 분석까지 경험은 넓게 퍼져 있었지만, 정작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구체적인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30대 중반이 지나가 버리는 건 아닐까. 위기감은 점점 커졌고, 취업 컨설팅 업체 결제 직전까지 갔다. 막상 결제하려고 하니 취업에 대한 의지는 절실했지만 비용이 부담스러웠다. 그 모습을 본 동생이 일부 금액을 지원해 주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까지 내 힘으로 못 할 일은 아니잖아.'


교대근무를 하며 힘들게 일하는 동생에게까지 손을 벌리면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내 미래를 맡기기 전에 내가 먼저 할 수 있는 일을 다시 해보기로 했다. 아무 일이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브랜드 매장 매니저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분명 뭐라도 시작하겠다는 각오였는데 막상 5년 전 연봉을 제안받자 마음이 복잡해졌다. 알바라도 하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막상 눈앞의 조건을 마주하니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의 가치가 숫자로 낮아진 것 같았고, 그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아직 덜 절실한 건가?'


원하던 합격이었지만 결정이 어려웠던 건 단순히 연봉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경력인지, 이후의 커리어에 어떤 영향을 줄지 판단해야 했다. 구직 기간이 길어질수록 불안해지는 건 사실이었지만, 무작정 선택하기에는 나이도, 안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의 성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선택은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었지만, 내게는 적지 않은 모험이자 리스크였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채용공고를 살피던 중 눈에 들어오는 자리가 있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무엇보다 좋아했던 오프라인 담당자 포지션이었다. 신규 오프라인 매장 오픈을 준비하는 파트 리더 자리였다.


'이거다.'

지금과는 다른 느낌의 끌림이었다.


이 포지션은 꼭 합격해야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고 채용공고에 별도로 요구하지 않았지만 그동안의 업무 경험을 담은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대표와의 면접에서 내가 어떤 일을 해왔고, 신규 매장을 준비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포트폴리오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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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합격이었다. 기존 연봉도 지킬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다시 맡게 되었다. 스타트업이라는 새로운 시스템 속에서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을 인정받고, 그 경험을 더 확장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네 번의 이직을 돌아보면 나는 한 번도 환승 이직을 하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다음 온라인 게임을 찾기까지 매번 공백기가 있었고, 그때마다 구직의 어려움을 겪었다. 익숙한 회사 밖에서 나를 다시 설명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는 일은 늘 쉽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반복해서 배운 것이 있다. 절실할수록 무작정 서두르기보다 잠시 돌아보고, 내가 가진 경험과 가치를 다시 살펴야 한다는 것. 불안한 마음에 스스로의 가치를 쉽게 낮춰 평가하거나, 눈앞의 기회를 무조건 붙잡을 필요는 없다는 것. 남들이 인정하지 않는 것도 스스로를 높게 평가하고 요구할 수 있는 준비와 자격을 갖춘다면 할 수 있다는 나에 대한 신뢰를 쌓는 시간이었다.


물론 원하는 기회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근거없는 자신감과 평가는 독이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알고, 그것을 상대에게 전달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채용공고에 요구하지도 않았던 어필용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내 가치를 알아봐 주기를 기다리는 것과, 내가 가진 가치를 보여주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구직 기간이 길어지면 마음이 급해진다. 그럴수록 나를 먼저 의심하고, 지금까지 쌓아온 경력을 낮게 평가하기 쉽다. 하지만 지나온 경험에는 아직 꺼내 보지 못한 가능성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절실하다는 이유로 나를 서둘러 결정짓지 말자. 내가 걸어온 시간을 다시 살펴보고, 원하는 방향을 향해 한 걸음 더 움직여 보자. 나를 위한 타이밍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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