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던 곳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말이 계속 돌고 있었다. 예산은 해마다 줄어들었고, 사람들은 하나둘 빠져나갔다. 직원들 월급날이 다가오면 내가 더 초조했다. 대표도 아닌데 말이다. 이곳이 무너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표님은 그 상황을 수습하기보다 지켜보는 쪽에 가까웠다. 담당 지자체도 뾰족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나는 혼자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어느 날 대표님이 나를 불렀다. "김 팀장, 직원들과 간담회를 좀 하지. 내가 자리를 마련할게. “직원들이 나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것 같았다.
며칠 후 정말 간담회가 열렸다. 열 명쯤 되는 직원과 관계자들이 나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하나둘씩 불만을 말하기 시작했다. 어떤 직원은 내가 사람을 몰아붙인다고 했다. 또 다른 직원은 내가 함부로 말을 한다고 했다. 불만이 있는 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듣고 있자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자리에 있던 대표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이 모든 게 나 혼자만의 일이라는 것처럼.
해명이든, 반박이든, 사과든 무엇이든 해야 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고 목만 맸다. 뭐라도 말하려는 순간, 대표님이 내 팔을 잡더니 성급히 자리를 끝내버렸다. 그래도 말해 볼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끝내하지 못했다. 모든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무서웠다. 그날 일을 되돌아보지 않는 것으로 상처를 대충 덮어두고는 일에 몰두했다. 행사까지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꽃잎이 오기 전 2년, 꽃잎이가 온 뒤 3년. 5년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토록 완수하고 싶던 대형 국제 행사도 결국 끝이 났다. 그 프로젝트를 뒤로하니,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다. 대학원에도 들어갔다. 뭐라도 계속 이어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왜인지 이게 답인 것 같지가 않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다음 길을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불현듯 이곳에 취업하기 전 만났던 헤드헌터가 생각이 났다. 훤칠한 키에 잔머리 하나 없이 빗어 넘긴 머리, 단정하고 반듯한 검은색 정장과 하이힐. 다시 메일을 보냈다. 며칠 후 답장이 왔다. 현재는 활동하고 있지는 않지만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어느 공유 스터디룸에서 만났다. 헤드헌터 선생님은 아주 달라져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수수한 옷차림.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 보았던 날카로움이랄지 그런 게 없었다. 나는 그간의 내 이야기를 했다. ‘국제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일하고 있는 분야에 학위가 없어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하지만 비싼 등록금을 내고 있는 것에 비해 배우는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선생님이 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우선 주렁주렁 멋을 잔뜩 부렸는데, 없어 보여요. 본인과 맞지를 않아요.” ‘역시 오기를 잘했군. 하지만 너무 찌르지는 말아 주세요.’ 멋쩍어서 크게 웃었다. “대학원에서 뭔가 큰 거를 얻으려고 하지 말고 우선 인사를 상냥하게 해 보세요. 인맥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한 것이라면 그런 게 먼저 아니겠어요?”선생님은 나를 꿰뚫고 있었다.
“저는 사실 이제 이 일을 하고 있지 않아요.”사실 선생님을 만나기 전부터 이게 제일 궁금했다. “왜요 선생님.” “아들이 아주 많이 아팠어요. 불치병이라고 하지요? 그런 병에 걸렸어요. 생각보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요즘 저는 명상을 해요. 명상하고 싶다는 생각이 혹시 든다면 저를 찾아오셔도 좋아요.”속으로 많이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선생님을 만난 후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출근하고, 퇴근해서 꽃잎이랑 놀고 또 새벽에 산바카라하고 그게 전부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는 바쁘게 돌아갔지만, 내 인생은 여전히 아득했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한 상담가를 소개받았다. 정식으로 상담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고 답답한 마음에 그저 대화나 나눠볼까 하고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식사를 마친 뒤 선생님이 집이 근처이니, 집에 가서 차나 한잔하자고 했다.
“차 준비해 갈 테니, 방에 들어가 계세요.”들어가자마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방의 삼면을 둘러싼 유리장 안에 수십 개의 손가락만 한 인형이 빼곡하게 놓여 있었다. “와~ 이게 다 뭐예요?” 나는 감탄하며 물었다. “마음에 드는 거 골라봐요.”선물인 줄 알고 마음에 드는 거를 골라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선생님은 차를 내려놓으며 안경 너머로 내 인형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음…. 되게 귀여운 인형을 골랐네요? 하하. 제가 직접 만든 젤리예요. 차랑 함께 들어봐요.”포도 맛 젤리였다. 손수 만든 젤리는 처음이었다. 한 접시를 다 비우고는 또 달라고 했다. 촉촉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상큼했다.
내가 뽑은 인형은 은빛 껍데기 안에서 진주를 품고 있는 분홍색 조개 소녀와, 벌거벗고 하얀색 팬티만 입은 채 양손을 들고 있는 한 소년이었다. 벌을 서는 듯했다. 소년의 입 모양은 ㅅ자였다. 내 입도 ㅅ자다. 선생님은 내가 어떤 인형을 고르는지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가만히 그 인형들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던 그 간담회 장면의 비밀이 풀리기 시작했다. 나를 관통해 온 거대한 에너지의 정체도 함께.
맞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진주를 낳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다. 그런데 나의 껍데기는 늘 비가 샜다. 구멍이 너무 높이 나 있어서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를 않았다. 그 비를 막아 줄 사람이 내 곁에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구멍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비를 막아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위태로운 알파가 되어 갔다. 집에서는 똑똑한 첫째 노릇을 하고, 회사에서는 해결사가 되었다. ㅅ자 소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비를 막을 수 없어,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던 아이. 그 아이는 혼자였다.
나는 직원들을 무척 좋아했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는 밥을 사주고, 술을 사주고 그들을 돌봤다. 어렸을 때부터 들쭉날쭉한 엄마의 기분을 살피는 일을, 숨 쉬듯이 해왔기 때문에, 직원들의 불편한 감정도 금방 읽어냈다. 그래서 그들이 힘들어할 때마다, 챙겼다. 그걸 몰라주는 직원들이 야속했다.
나는 점점 혼자가 되어 갔다. 편의점에서 맥주 4캔으로 외로움을 달랬다. 부족하면 와인을 더 마시기도 했다. 취하면 눈물이 나왔고, 눈물이 나면 꽃잎이가 와서 핥아 주었다.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지.
그날 만난 ㅅ자 소년이 말해주고 있었다. 외롭고 무서웠다고. 그랬다. 나는 그들이 내 편이 되어주길, 나와 함께 그 위태로운 조직을 지켜주길 바랐던 것이다. 안전해지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그들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자, 나를 공격하고 언제든지 끌어내릴 수 있다는 의심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일의 압박이 커질수록 나도 모르게 그들을 통제하려고 했다. 나는 초조해졌다. 생기를 잃고 마른 잎사귀같이 바스락해졌다.
가끔 맥주를 마시면서 일하기도 했다. 심지어 직원들에게 맥주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다. 그럼에도 안전하지도, 즐겁지도 않은 그곳을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게 익숙했으니까. 더 좋은 곳이 있을 리 없고, 그런 곳이 있다고 해도 나를 받아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텅 비어버렸다. 빗줄기는 더 굵어지고 있었다. 그즈음 꽃잎이의 눈도 뿌옇게 되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보니 백내장이 진행된 것 같다고 했다. 아직 백내장이 올 나이가 아닌데 이렇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유전적인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꽃잎이는 아직 어리니까 수술을 고려해 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몇 주 후 꽃잎이는 벽에 얼굴을 부딪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