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휴일이어서 꽃잎이와 산바카라부터 나갔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개천 옆길이었다. 보도가 따로 없어 차와 사람이 함께 다니는 그 길 위로 쏴 흐르는 물소리가 깔렸다. 머리 위로는 새들이 시원하게 날개를 폈고, 저 멀리 둥근 산세가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산바카라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아주 가까운 거리도 차로 이동했기 때문에 길 위를 걷는 사람은 드물었다.
산바카라을 좋아하지만, 이곳에 온 뒤로는 잘 다니지 않았다. 외지인이었던 나는 늘 겉돌았고, 마치 내가 바이러스가 된 것만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꽃잎이가 내 곁에 있었고, 그래서 더 눈에 띌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꽃잎이가 나오자마자 캑캑 소리를 내며 앞장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애가 며칠 동안 영문도 모른 채 갇혀있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꽃잎이는 궁금했을 거다. 자기가 혹여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닌지. 가슴줄을 계속 바라봤다는 말이 맴돌아서 꽃잎이가 가자는 대로 따라갔다.
“개한테 끌려다니면 안 돼. 확 잡아채.”
우리를 보는 사람마다 한 마디씩 했다. 하지만 난 꽃잎이한테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이 들어, 여전히 줄을 느슨하게 쥐고 꽃잎이의 뒤만 좇았다.
엉성한 산바카라을 이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산바카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언제나 그렇듯, 세탁소집 황구가 우리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황구를 흘깃 보고 그 앞을 지나가려는데 순간 꽃잎이가 확 튀어 나가더니, 줄이 손에서 탁 빠져나갔다. 몸이 훅 꺼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정신없이 뛰어 따라가 보니, 꽃잎이가 황구에게 배를 보이고 누워서는 눈을 감은 채 웃고 있었다. 꽃잎이의 화살표 모양 흰색 꼬리도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황구가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몰라 무서워서 황구 쪽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꽃잎이 쪽으로 간신히 손을 뻗어, 목줄을 살살 잡아당겼다.
‘황구야 우리를 풀어줘. 제발.’
꽃잎이는 아무런 저항 없이 누운 채 내 쪽으로 미끄러져 왔다.
“이 개 엄청 사나운데 놓치면 어떻게 해요? 큰일 날 뻔했네.”
보이지 않던 세탁소 주인이 어느새 나와서는 퉁명스럽게 내뱉고 돌아섰다. 긴장이 풀리자, 이제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세탁소 주인에게, 황구에게, 꽃잎이에게, 그리고 줄 하나 제대로 못 잡은 나에게.
“너 큰일 날 뻔했잖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응?”
나는 붉게 물든 꽃잎이의 콧잔등을 손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꽃잎이가 내 입을 핥았다. 나는 가만히 꽃잎이의 머리에 입을 댔다. 뜨거웠다. 그 머리 냄새를 한참 동안 맡고 있었다.
'요 녀석도 사실은 많이 무서웠겠지?'
문득 어릴 적 생각이 났다. 그때는 개를 참 많이도 무서워했었다.
내가 초등학교도 다니기 전, 우리는 어느 주택 2층에 세 들어 살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엄마는 양동이를 받치고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짓곤 했다. 그때는 가난이 무엇인지, 엄마의 한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나는 그저 엄마를 웃게 해주고 싶었다.
아빠가 늦게 오는 날이면 현관문 밖으로 나와 엄마랑 동생이랑 아빠를 기다렸다. 골목을 내려다보며 아빠가 오는지 살피기도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세기도 했다. 그게 참 좋았다. 낮이면 그 골목에는 구슬치기, 딱지치기하는 소년들로 왁자지껄했고, 나는 동생과 그 골목에서 거의 매일 달리기 시합을 했다. 늘 내가 이기는 시합이었다.
그때는 떠돌아다니는 개들이 많았다. 엄마는 나에게 가게 심부름을 자주 시켰다. 콩나물 두부 같은 걸 사 오라는 심부름이었는데 동생은 무서워해서 나에게만 주어지는 임무였다. 나는 심부름을 떠나기 전 골목에 개들이 있는지부터 확인하고 출발했다. 골목을 따라 끝까지 걸어가 왼쪽으로 꺾어서 얼마쯤 걸어가면 가게가 나왔다. 골목 끝에 다다르면 기도했다.
‘제발 오늘은 개들이 없게 해 주세요.’
어떤 날은 그 기도가 이루어졌고, 어떤 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개들을 만나면 덜덜 떨렸지만 못 본 체하고 씩씩하게 걸어, 가게까지 갔다. 거스름돈까지 잘 챙기면 임무 완수. 엄마가 웃으면서 우리 딸 잘했다고 칭찬해 주면, 어깨가 으쓱해졌다. 엄마가 기뻐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어렸을 때 나는 내가 작은 용사라고 생각했다. 슈퍼맨 같은. 그리고 이제는 작은 용사 둘이 그 지역을 누비며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꽃잎이는 처음에는 개에게 짖었고, 그다음에는 사람에게 짖었다. 어느 날부터는 주차차단기에까지 짖었다. 현관 경사로에 걸터앉은 할머니들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우리한테 뭐라고 뭐라고 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꽃잎이는 더 크게 짖어댔다. 주차차단기가 입을 쫘악 벌리고 올라가면 꽃잎이는 비장하게 날아올랐다. 마치 거대한 악당의 입속으로 들어가려는 듯. 나는 그럴 때마다 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얘 도대체 왜 이래요?”
경비아저씨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경비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창피했다.
개천 앞에서 함께 먹으려고 정성껏 싸간 간식들이 가방 안에 그대로 있을 때가 많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하루 종일 일 생각만 하던 내가 이제는 꽃잎이 생각도 했다. 아니, 일보다 꽃잎이 생각을 더 많이 했다. 틈만 나면 전문가들의 글과 영상을 찾아봤다. 꽃잎이의 용품들도 하나둘 주문했다. 강아지가 자유롭게 걸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는 2m짜리 긴 리드줄과 꽃잎이의 눈 얼룩 색과 꼭 닮은 갈색 코트도 함께 장만했다. 리드줄을 바로 연결할 수 있는 코트였다. 입혀놓으니, 세상에서 제일 예쁜 강아지가 되었다.
어느 날씨 좋은 날, 꽃잎이를 예쁘게 단장시키고 밖으로 나왔다. 숨어 지내던 내가 꽃잎이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그렇게 길을 나서고 있었다. 그 지역은 아직 마당개가 많던 시절이라 더 눈에 띌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나가고 싶었다.
바람이 기분 좋게 불고 있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기 전이라 세상은 푸르스름했다.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만끽하고 있던 그때, 또 꽃잎이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차차단기가 또 그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재빨리 꽃잎이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2m 리드줄은 꽃잎이와 나 사이에서 넘실거릴 뿐,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갈색 코트는 또 어떠한가? 마치 해본 적이 있다는 듯 몸을 좌우로 두 번 흔들더니, 목을 몸 쪽으로 쭉 끌어당겨 리드줄이 연결된 코트에서 쏙 빠져나왔다. 정말로 자유를 얻은 꽃잎이는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경비아저씨와 지나가던 주민들이 약속이나 한 듯 꽃잎이를 잡으러 모여들었다. 엉덩이를 위로 들어 올린 채, 요리조리 피하며 마치 놀이를 하듯, 더 신나게 도망 다니고 있었다. 나는 얼어붙은 채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때 차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꽃잎아아!"
꽃잎이가 눈을 똥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틈을 타 확 낚아채 들어 올렸다.
“아니, 관리를 못 할 거면 키우지를 말아야지. 에잇! 쯧쯧”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말이 낯설지 않았다. 엄마에게 늘 속으로 하던 말이었다.
‘이럴 거면 뭐 하러 둘이나 낳았어?’
그토록 싫어하던 엄마의 그림자가 내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이제 산바카라은 공포가 되었다. 마치 모든 아파트 주민들이 우리를 아는 것만 같았다. 꽃잎이가 짖을 때마다 나는 거칠게 끌어당기고 소리를 질러댔다. 내가 이 아이를 방치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신호를 주민들에게 주고 싶어서였다. 이러려고 데려온 게 아니었다. 이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가정 방문 훈련을 받아보기로 했다.
며칠 후 선생님이 오셨다. 커피를 내리려는데 긴장했는지 캡슐을 넣은 홀더가 기계에 끼워지지 않았다. 한참을 커피머신과 씨름하자 선생님은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앉으세요.”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꽃잎이와 터그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친해지자, 선생님이 물었다.
“꽃잎이는 어떤 아이에요?”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씩 이야기했다. 자기 이야기인 줄 알았는지 꽃잎이는 내 무릎 위에 앉아 선생님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꽃잎이가 주차차단기, 자동차 와이퍼 같은 막대기 모양만 보면 유독 심하게 흥분한다고 말하자, 방안에 정적이 흘렀다. 어느새 선생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사실 나도 짐작하고 있었다. 마주하기가 무서웠을 뿐. 선생님은 꽃잎이의 얼굴을 만져주었다. 천천히, 오래.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나눈 뒤 함께 산바카라하러 나갔다.
“얘는 지금 산바카라을 전혀 즐기고 있지 않아요. 무척 긴장하고 있네요. 산바카라은 편안해야 합니다.”
‘그걸 모르지 않아요.’
그냥, 좀 선생님이 알아서 해결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꽃잎이에게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가 없었다. 일이 많이 밀려있었다. 꽃잎이가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보호자님, 꽃잎이는 알파독 성향이 강한 아이예요. 개들은 원래 무리 안에서 질서를 되게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우두머리 개가 무리의 기준이 돼요. 그런데 지금 꽃잎이는 그 역할을 자기가 해야 한다고 믿는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예민해지고 긴장하는 거예요. 보호자님이 먼저 중심을 잡아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꽃잎이도 ‘아, 내가 다 신경 안 써도 되는구나.’ 하고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거든요.”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온 꽃잎이에게 나는 길잡이가 되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닮은 점이 많았다. 늘 긴장되어 있고, 불안해서 앞장서려고 하는 그 모습이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 주유소 입구에서 춤추고 있는 바람 풍선을 보며 나랑 닮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속 빈 바람 풍선은 바람 따라 팔을 휘적대며 춤을 춘다. 꽃잎이와 나도 휘청거리며 열심히 춤을 추고 있었다.
선생님은 떠나면서 나에게 과제를 주었다. 꽃잎이와 따로 자고, 산바카라을 나설 때 현관문을 꽃잎이보다 먼저 나설 것. 걸을 때는 꽃잎이를 따라가지 말고, 나란히 걸을 것. 그리고 꾸준한 기다려 훈련을 통해 기다리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가라고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선생님의 과제를 하나도 수행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기다려 훈련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는 꽃잎이를 높은 곳에 올려놓고 해 보라고 했다. 나는 꽃잎이를 가슴 높이쯤 되는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오른쪽 손바닥을 보여준 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려!”
보상 간식을 든 나의 왼손이 기다리지 못하고 자꾸 먼저 나가려고 했다. 꽃잎이는 귀찮다는 듯 그대로 뛰어내렸다.
머리맡에 있던 꽃잎이 방석을 방문 밖으로 빼고 문을 닫았다. 사실 별로 쓰지도 않는 방석이었다. 꽃잎이는 늘 내 다리 사이나 어깨에서 잤으니까. 문을 닫자마자, 꽃잎이가 울기 시작했다. TV도 켜보고 이어폰도 껴보고 했지만, 내 귀는 계속 문밖을 향해 있었다. 삼십 분이 지났을 때였다. 훈련이고 뭐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품 안으로 뛰어드는 꽃잎이를 상상하며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꽃잎이는 언제 울었냐는 듯,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나를 스쳐 지나가더니 내 이불 한가운데 털썩 드러누웠다.
산바카라훈련이 제일 엉망진창이었다. 산바카라 준비를 시작하면 꽃잎이는 그때부터 흥분하기 시작했다. 나는 옷도 몰래 조용히 갈아입었다. 선생님은 꽃잎이가 흥분하면 집 안에서 먼저 산바카라을 하다가 진정이 되면 나오라고 했다. 그런데 대체 얼마나 집에 있어야 차분해지는 건지 끝내 알 수가 없었다. 산바카라하러 나간다는 걸 들키는 순간, 꽃잎이는 방 끝에서 거실 끝까지, 다시 거실 끝에서 방 끝까지 쉴 새 없이 뛰기 시작했다. 현관문 밖으로 내가 먼저 나오는 일은 지금까지도 없다.
말을 잘 들을 때 주려고 산 트릿 간식이 내 가방 위에서 달랑거리고 있었지만, 나는 이 간식 통 뚜껑을 열어 볼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끌려다니느라. 까마귀가 울면 까마귀 쪽으로 뛰고, 고양이가 나무 뒤로 숨으면 끝까지 찾아내야 직성이 풀렸다. 어느 날은 아무리 짖어도 나무 위에 있는 새가 울음을 멈추지 않자, 기둥에 이빨을 콱 박더니 나무를 잘라내려고까지 했다.
방문 교육을 받기 전보다 오히려 꽃잎이의 흥분은 심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짖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향해 짖고 있었다. 꽃잎이는 점점 더 많은 것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온통 신경 써야 할 것들로 가득 찬 것처럼.
정말이지 나 때문에 꽃잎이가 이렇게 변해버린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꽃잎이는 내가 가진 오래된 불안을 나보다 더 잘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의 작은 용사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도. 맞다. 나는 그때까지 세상이 안전하다고 느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아니, 전혀 없었다. 정말 꽃잎이가 그걸 알았을까?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담임 선생님이 종합장에 크레파스로 낱말들을 적어 오라고 했다. 크레파스가 묻으니까 뒷면은 쓰지 말고 앞면만 쓰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랑 숙제하는데, 엄마가 말했다.
“아깝게 왜 뒷장을 안 써?”
“선생님이 이렇게 하라고 했어.”
“아니야, 니가 잘못 들은 거야. 그냥 뒷장도 써.”
다음 날, 줄을 서서 선생님께 숙제 검사를 받는데 선생님의 손이 갑자기 내 뺨으로 날아왔다. 깜짝 놀라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날은 비가 많이도 내렸다. 우산을 든 엄마가 학교 후문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엄마를 보자마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엄마 때문에 나만 혼났잖아! 내 말이 맞았잖아.”
억울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를 않고 계속 걸리기만 했다. 엄마의 왕방울만 한 눈의 흰자에 핏줄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나를 앞질러 빨리 걷기 시작했다. 엄마의 검은색 바탕의 회색 줄무늬 엉덩이가 그날따라 유난히 씰룩거렸다. 그 엉덩이만 보였다.
며칠 뒤 엄마는 학생들에게 노트와 필기구를 선물로 돌렸다. 아무 날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친구들은 아무 날도 아닌데 선물과 간식을 돌리곤 했다. 나도 그런 엄마가 생긴 것 같아서 좋았다. 엄마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복도에서 선생님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들키지 않기 위해 창문 너머를 흘끔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활짝 웃는 선생님의 이빨에 금니가 반짝거렸다.
그날 이후 선생님은 나를 살갑게 대해주었다. 먹기 싫다는 급식 우유에 설탕을 타서 억지로 먹였다. 토할 것 같았다. 나중에야 알았다. 사실 종합장을 바로 쓰고 안 쓰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엄마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선생님에게 선물과 돈을 건넸다. 그때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딸의 뺨을 때린 선생님 앞에서 웃고 서 있어야 했던 엄마의 마음이라는 게. 그 이후로 숙제, 준비물들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일종의 강박증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