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찾기

프롤로그

by피어라

2, 3, 27, 50, 70. 아무 의미없이 나열된 숫자같지만, 이 숫자들은 지금 나를 이루고 있는 숫자들이다. 70년대생 X세대, 50대 초반, 삼남매 중 맏이, 두 아들의 엄마, 27년 차 초등교사. 간단한 숫자로 나를 설명할 수 있지만 숫자들 너머에 더 많은 내가 숨어있다.


예를 들면 두 아들이라는 숫자 뒤에는 갑자기 변모한 사춘기 자녀와의 관계에서 당혹해 하는 내가 있고, 50이라는 숫자 뒤에는 갱년기를 앞둔 쓸쓸한 내가 있다. 그 너머로 아닌척 하지만 80세 노부모님 돌봄이 부담스러운 나와 온라인 게임생활에서 오는 피로감에 절은 나, 친밀한 관계의 단절로 인한 외로움에 발버둥치는 나도 있다. 이렇게 숨은 '나'들을 찬찬히 들여다 본다.


혼자도 잘 지내실 것 같았던 시아버님은 허리 수술 후로 실버타운 입주를 결정하셨고, 오는 9월에 들어가려 준비중이시다. 재작년에 우리집 근처로 이사하신 지 친정부모님도 차례로 병치레를 하셨다. 아버지는 작년 여름 무릎수술을, 엄마는 올 초 백내장 수술을 받으셨다. 이제는 혼자 병원 다니는 것도 버거워하신다. 여기저기 아픈 곳이 늘어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진료다니고 약을 챙겨드린다. 기력이 쇠해져서인지, 잘 안 보여서 그런지 이전처럼 깔끔하게 정리도 못하신다. 먼지가 앉거나 벌레가 생겨도 모르고 곰팡이도 그냥 지나치신다. 남편과 내가 수시로 집안 구석구석 지저분한 곳을 치우고 정리할 수 밖에 없다. 자잘한 부분을 청소하고 고장난 부분을 손본다. 필요한 물품을 사다드리고 위험한 곳을 치운다. 주말이 더 바빠졌다. 때로 뿌듯하고 때로 모른 척 하고 싶다.


어찌어찌 큰아들의 대입이 끝났다.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손을 놔도 되겠다 싶었지만, 생각만큼은 아니었다. 대학에 들어갔어도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는 벼슬이 솟아난 중병아리 일뿐이지 하루아침에 홰를 치며 우는 수탉이 될 수 없었다. 여전히 부모의 도움이 더 필요했다. 성인이 되면 자립해야한다고 잔소리해댔어도 어림없다는걸 나도 알고 아이도 알았다. 중3 작은 아들은 연애를 시작했다. 내 기준으로 이해되지 않는 언행들을 당당히 하며 용돈만 요구했다. 외모와 관계가 더 중요해진 아들은 부모를 밀어내고 싶어한다. 이 당연한 과정에서 서로 마음 상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했다. 서운하고 괘씸하고 억울했다. 참는 게 이기는 거라는 말을 열여섯 살을 보며 하게 될 줄이야.


노년의 부모님과 어린 자녀를 돌보는 틈에 나도 조금씩 허물어져갔다. 아무리 100세 시대라지만, 50대 이후의 삶이 3,40대 같을 수 없다. 일단 몸이 다르다. 어제까지 잘 오르던 계단을 오늘은 삐그덕대며 가신히 오른다. 잘 알고 있는 단어가 혀끝에서 맴돌뿐, 입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머리카락은 빠지고 뱃살은 자꾸만 늘어난다. 턱이 아파 맥주에 오징어를 곁들여 씹지 못한다. 이가 시려 찬 것과 신 것을 못 먹는다. 허리를 숙였다 펴는 일이 두렵다. 몸이 부실하니 마음도 자꾸 부스러져 짜증이 늘고 인내심이 줄어든다. 사소한 일에도 날카롭게 반응하고 여기저기 서운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쇠락해가는 육신과 정신이 애처로워 갱년기라고 핑계를 댄다.


이게 나만 겪는 일이 아니다. 자녀를 키우며 부모를 돌보는 4,50대들이 공통적으로 감당하고 있는 상황일것이다. 90년대에는 X세대를 새로운 문화를 선도하는 젊은 세대라고 말했지만, 그때 20대였던 세대가 중년이 된 지금은 ‘낀세대’라고 불린다. 부모를 돌보는 마지막 자녀 세대이자 자신의 자녀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할 첫 세대라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 끼어있는 것도 쉽지 않은데, 덧붙여서 늙어가는 나를 보듬어야한다. 누구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면, 나라도 나를 돌봐야하지 않나. 내가 먼저 나를 챙겨주고 싶어졌다.


예전에는 계절을 만끽하려면 계절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계절이 지나가는 자리를 들여다본다. 선명한 화면이 흐릿해지며 겹쳐지다 다음 장면으로 전환되는 슬라이드의 한 장면처럼 계절의 사이를 들여다본다. 그러면 오는 것과 가버린 것을 명확히 깨닫게 되고, 건너는 과정들이 애틋하게 다가온다. 그 마음으로 부모와 자식 사이에 끼어있는 나를 돌보는 일상을 기록하려한다. 2, 3, 27, 50, 70, 말고 다른 숫자들을 더 찾아 나를 채우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나와 같은 숫자를 찾아 힘을 얻는다면 더 기쁘겠다는 욕심도 담아서, 열심히 찾아본다.



*새로 온라인카지노북을 시작해봅니다. 컨셉을 잡고 목차를 정해서 새로 쓰는 글보다는 이전에 썼던 글로 재구성한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만, 썼던 글들을 하나로 묶어보고 싶었습니다. 좋은 컨텐츠가 없어 울궈먹기 같단 생각도 합니다만, 그래도 지금까지의 나와 그나마 어제보다 조금 나아진 지금의 나를 정리하는 의미랍니다. 겨우 이 정도, 겨우 이만큼이더라도요.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니터 너머의 여러분.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