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내면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가?

by파사리즘

같은 것을 경험해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은 편지를 쓴다. 어떤 사람은 그림을 그린다. 어떤 사람은 요리를 해준다. 어떤 사람은 묵묵히 곁에 있는다. 어떤 사람은 춤을 춘다. 이 모든 것이 같은 감정의 다른 언어들이다.

표현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면서도, 실제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언어가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정교한 표현 수단이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경향이 있다. 말로 설명하지 못하면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처럼, 글로 쓰지 못하면 충분히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언어로 담기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음악이 주는 감동을 말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어떤 공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언어로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 몸이 기억하는 것들을 말로 꺼내기 어렵다. 이것들이 언어 밖에 존재하는 내면의 영역이다. 그리고 그 영역을 표현하는 방식이 언어 이외의 것들이다.

이 질문이 묻는 것은 취미나 특기가 아니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나를 세상에 내보내는가. 내 안의 것이 어떤 경로를 통해 나와 다른 것들 사이를 연결하는가.


세 가지 표현 방식의 고유함

언어, 예술, 행동이라는 세 가지 표현 방식이 각각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언어는 가장 정밀한 도구다. 개념을 구분하고, 논리를 연결하고, 시간 순서를 배열하고,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한다. 언어가 가장 강력할 때는 내면의 복잡한 것을 정리하고 타인과 공유해야 할 때다. 하지만 언어는 선형적이다. 한 번에 한 가지를 말해야 한다. 동시에 여러 층위에서 경험되는 것을 언어로 담으면, 그 동시성이 사라진다. 그리고 언어는 슬롯적으로 학습된 것이기 때문에, 슬롯가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경험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

예술은 언어가 닿지 못하는 곳에 닿는다. 음악은 감정의 질감을 전달한다. 조형 예술은 공간과 관계를 표현한다. 춤은 몸의 지식을 나타낸다. 예술이 강력한 것은 그것이 언어를 우회하여 직접적으로 경험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좋은 음악을 들을 때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처럼. 예술은 설명하지 않고 경험하게 한다. 하지만 예술은 구체적인 것을 정밀하게 전달하기 어렵다. 그래서 언어와 예술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

행동은 가장 직접적인 표현이다. 말하지 않고 한다.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 행동이 강력한 이유는 그것이 실제 세계를 바꾸기 때문이다. 언어와 예술이 세계를 묘사하거나 해석한다면, 행동은 세계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행동은 의도를 완전히 전달하지 못할 수 있다. 같은 행동이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래서 행동도 종종 언어나 예술로 보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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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주된 표현 방식을 아는 것

우리 각자는 이 세 가지 중 더 자연스럽게 기울어지는 방식이 있다. 이것이 우열이 아니라 고유함이다.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경험하면 그것을 말이나 글로 정리하고 싶어한다. 일기를 쓰거나, 친구에게 자세하게 이야기하거나, 글로 생각을 꺼내는 것이 내면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표현되지 않은 것은 완전히 경험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언어화가 경험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예술로 표현하는 사람은 감정이나 경험을 형태, 색, 소리, 움직임으로 변환한다. 이런 사람들은 슬플 때 그림을 그리거나, 화날 때 악기를 연주하거나, 기쁠 때 몸을 움직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 예술로 나올 때 더 온전히 표현된 느낌이 든다.

행동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사랑을 말하는 것보다 요리해주는 것으로, 감사를 말하는 것보다 도움을 주는 것으로, 걱정을 말하는 것보다 곁에 있어주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행동이 말보다 더 진실하게 느껴진다. 말로 하면 오히려 어색하거나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행동으로는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런데 자신의 주된 표현 방식이 타인의 수용 방식과 다를 때 오해가 생긴다.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이, 말로 표현받고 싶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아무리 많이 해주어도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오지 않는 상대와, 이렇게 많이 하는데 왜 모르는가 하는 자신. 표현의 언어가 다른 것이다.

게리 채프먼이 말한 '사랑의 언어'가 이것이다. 인정하는 말, 봉사 행위, 선물, 함께하는 시간, 스킨십의 다섯 가지. 자신이 사랑을 주는 방식과 받고 싶은 방식이 다를 수 있고, 상대방과도 다를 수 있다는 것. 이 다름을 아는 것이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이 되기도 한다.


언어가 만들어내는 것과 가두는 것

언어에 대해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 시대가 언어 표현을 지나치게 특권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강력하지만 동시에 함정이 될 수 있다. 언어로 표현된 것이 실제 경험보다 더 명확하고 진실한 것처럼 보이는 착시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경험 자체보다 그것을 언어화하는 것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쓰기도 한다. 소셜미디어가 이것을 강화한다.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그것을 즉시 언어나 이미지로 변환해야 하는 압박. 그 변환 과정에서 경험의 살아있는 부분이 빠져나가는 것을 우리는 어렴풋이 느낀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침묵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언어로 담기지 않는 영역이 존재하며, 그 영역을 억지로 언어화하면 오히려 그것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언어가 경험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어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감정이 더 선명해지고 다루기 가능해진다. 이름 없는 슬픔보다 이름 있는 슬픔이 더 잘 처리된다. 언어가 경험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경험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글을 쓰는 것이 생각을 명확하게 해주고, 이야기하는 것이 감정을 정리해주는 이유다.


몸이 기억하는 것들

표현의 방식 중에서 가장 간과되는 것이 몸을 통한 표현이다.

몸은 언어가 닿지 못하는 것들을 기억한다. 오래전 상처가 특정 냄새나 소리에 반응하는 것,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이 몸의 긴장으로 나타나는 것, 깊은 슬픔이 가슴의 무게감으로 경험되는 것. 이것들이 몸이 기억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몸을 통한 표현이 이것들에 닿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춤이나 움직임이 언어로 접근하기 어려운 경험들을 처리하는 방법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걷는 것이 복잡한 생각을 정리해주는 이유도 이것이다. 요리하거나 정원을 가꾸는 것이 위로가 되는 이유도. 몸이 무언가를 할 때, 몸이 기억하는 것들이 함께 움직인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평생 탐구한 것이 이것이었다. 인간은 몸이 있는 의식이 아니라, 의식이 있는 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이 순수한 정신의 작용이 아니라, 몸이 세계와 접촉하는 방식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몸을 통한 표현이 언어나 예술과 대등하거나 그것들의 기반이 된다.


억압된 표현 방식들

우리 각자에게는 표현하고 싶지만 허용하지 않아온 방식들이 있을 수 있다.

어릴 때 노래를 좋아했지만 잘 못한다는 말을 들어서 포기한 것,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예술적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서 접어둔 것, 춤을 추고 싶었지만 몸치라는 딱지가 붙어서 시도하지 않은 것. 이것들이 표현의 욕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억압된 것일 수 있다.

억압된 표현 방식이 있을 때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특정 예술 작품을 볼 때 이유 모를 강렬한 감동을 느끼는 것, 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부러움과 함께 약간의 슬픔이 오는 것, 술자리에서 갑자기 노래를 부르거나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 때 예상치 못한 몰입이 일어나는 것. 이것들이 억압된 표현 욕구가 살아있다는 신호다.

표현이 잘 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노래를 잘 하기 위해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무언가가 노래를 통해 나오기 때문에 노래하는 것.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 안에서 언어로는 닿지 못하는 자신의 어떤 부분을 만나기 때문에 그리는 것. 표현의 목적이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 자체에 있을 때, 기술의 수준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AGI 시대, 표현의 새로운 의미

AGI 시대에 언어 표현의 영역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AI가 글을 쓰고, 이미지를 만들고, 음악을 작곡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것이 인간의 표현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한편으로는 표현의 기술적 장벽이 낮아졌다. AI의 도움으로 이전에는 기술이 없어서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악보를 읽지 못해도 음악을 만들 수 있고, 그림 기술이 없어도 시각적 표현을 할 수 있다. 이것이 표현의 민주화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위험이 있다. AI가 표현을 대신할 때, 그 표현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생각을 발견하는 것, 그림을 그리면서 감정이 형태로 나오는 것, 음악을 만들면서 내면의 무언가가 소리로 변환되는 것. 이 과정들이 표현의 결과물만큼 중요하다. AI가 결과물을 만들어주면 이 과정이 사라진다.

AI가 더 잘 만들 수 있어도 내가 직접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표현의 영역에서 그 이유가 가장 선명하다. 내가 표현하는 것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표현 행위를 통해 나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AI가 대신 만든 것은 내 표현이 아니다. 아무리 그것이 내 의도를 반영하더라도.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나는 나의 내면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두 가지 방향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지금 내가 주로 사용하는 표현 방식이 무엇인가이다. 기쁠 때, 슬플 때, 복잡한 감정이 올 때 내가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누군가에게 전화하는가, 일기를 쓰는가, 걷는가, 무언가를 만드는가, 그냥 행동으로 보여주는가. 이것이 나의 주된 표현 언어이다.

두 번째는 내가 사용하지 않고 있는 표현 방식 중에 시도해보고 싶은 것이 있는가이다. 억압된 표현 욕구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지금 당장 잘 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그냥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표현 방식을 안다는 것이 자신을 더 잘 안다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나를 세상에 내보내는가. 그 방식이 충분히 살아있는가. 아니면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 굳어있는가. 이 물음이 자신의 표현 언어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시작이다.



이 글은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살게 하는가》에 담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무우인간 : 바카라에 담지 못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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