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은 씻다가 나왔다

byjeromeNa

밤늦게 이력서를 펼쳤다. 내가 지나온 시간이 표로 나온다.


회사명, 프로젝트명, 기간, 담당 업무, 사용 기술. 26년을 다섯 칸에 맞춰 넣으려면 사람보다 날짜가 중요해진다. 긴 줄이 셋, 1년 안팎으로 끝난 짧은 줄이 여럿. 빈 기간은 거의 없다. 줄은 가지런하고 경력은 끊기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 밤에는 다른 것을 찾고 있었다.


'이 가운데 무엇이 내 것일까.'


면세점에서 만든 화면을 떠올렸다. 기업마다 돌면서 사내 식당/카페에 시스템을 설치하던 기억, 호텔에서 고친 기능도 떠올렸다. 밤늦게 장애를 잡고, 문을 열기 전까지 데이터를 맞추고, 누군가 포기한 코드를 넘겨받아 다시 움직이게 한 날도 있었다. 기억은 많았다. 다만 그 기억마다 회사 이름이 먼저 붙었다. 내가 만든 것이지만 내 것은 아니었다. 이력서에 내 이름은 맨 위에 한 번 나오고, 그 아래에는 남의 이름이 길게 이어졌다.




문득 김창열의 물방울을 생각했다.


그의 물방울은 금방이라도 캔버스에서 흘러내릴 듯 맺혀 있다. 손가락을 대면 젖을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물감이다. 진짜 물방울은 잠깐 머물다 사라진다. 그가 그린 물방울은 마르지 않았다. 한 번 발견한 것이 한 사람의 생애를 따라갔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jeromeNa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활동 시기의 반 이상을 개발자로 살아왔습니다. 앞으로의 삶은 글과 창작자, 후배 양성으로 살아가 보려 합니다.

724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3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57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