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과 현대미술 참견시점
5. 상처 사이로 금빛이 흐른다 — 부활과 회복의 미학
부활한 몸에는 못 자국이 남아 있었다.
회복은 상처를 삭제하는 일이 아니라
상처가 마지막 말이 되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다 나은 줄 알았는데, 왜 아직도 아프지?”
“상처가 남았다는 건 회복되지 않았다는 뜻일까?”
“아니면…… 흔적을 지우지 않고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우리는 회복을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깨진 것은 감쪽같이 붙이고, 흠집은 보이지 않게 메우고, 아픈 기억은 빨리 잊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상처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몸에 흔적을 남기고, 한 슬롯가 경험한 전쟁과 재난은 다음 세대의 기억 속으로 이어집니다. 사과를 받았다고 해서 잃어버린 시간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건물을 다시 세웠다고 해서 그곳에서 사라진 삶까지 복원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회복은 무엇일까요.
기독교의 부활 이야기에는 뜻밖의 장면이 나옵니다. 다시 살아난 예수의 몸에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는 장면입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 요한복음 20장 27절
부활한 몸은 십자가 이전의 깨끗한 몸으로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못 자국과 창 자국을 품은 채 새로운 몸으로 나타났습니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더 이상 죽음과 패배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새로움은 원상복구와는 다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고린도후서 5장 17절
여기서 ‘새것’은 과거를 지워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과거와 상처가 더 이상 삶의 마지막 결론이 되지 못하게 하는 변화에 가깝습니다.
이 두 문장을 종교적 고백으로만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상처를 숨기거나 삭제하지 않으면서도 다시 살아갈 수 있는가, 깨어진 존재가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새로워질 수 있는가를 묻는 인간 보편의 질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술도 오랫동안 같은 질문을 던져왔습니다.
카데르 아티아 (Kader Attia), 《The Object’s Interlacing》, 2020
어두운 전시장에 영상 스크린이 세워져 있습니다. 화면에는 철학자와 역사학자, 정신분석가, 인류학자와 박물관 전문가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식민지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반출된 문화재를 어떻게 돌려주어야 하는지 이야기합니다.
스크린 앞에는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조각을 본뜬 복제품들이 놓여 있습니다. 일부는 3D 프린터로 제작됐습니다. 조각들의 그림자는 스크린 위로 길게 드리워져, 영상 속 발언자들의 얼굴과 목소리에 겹쳐집니다.
카데르 아티아(Kader Attia)의 《The Object’s Interlacing》입니다.
참고영상은 다음 링크를 클릭>>> https://youtu.be/ZmfjJLL2fkg?si=baobqvPtDvZBkr9y
이 작품은 “빼앗아간 유물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결론만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아티아가 던지는 질문은 그보다 복잡합니다.
물건을 원래 장소로 돌려보내면 손상된 역사는 모두 회복되는가.
약탈된 조각 한 점을 반환한다고 해서 식민지 지배가 파괴한 언어와 공동체, 기억과 존엄까지 함께 돌아오는가.
서구의 박물관은 훼손된 물건을 복원할 때 균열과 결손을 감쪽같이 숨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완전한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원은 물건을 아름답게 보존하지만, 무엇이 그것을 깨뜨렸는지는 보이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반면 아티아가 주목한 일부 비서구 문화권의 수리는 균열을 숨기지 않습니다. 깨진 부분을 실과 금속, 나무 조각으로 이어 붙이고 그 흔적을 그대로 남겨둡니다. 수리된 물건은 이전과 똑같아지지 않습니다.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몸에 기록한 채 공동체 안에서 다시 사용됩니다.
아티아에게 수리는 기술적인 복원이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누가 파괴했는가. 누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가. 누구의 목소리로 가치를 설명해왔는가. 그리고 회복의 방식은 누가 결정하는가.
2024년 베를리니셰 갤러리에서 이 작품과 함께 전시된 《J’accuse》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얼굴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군인들을 본뜬 거친 목조 두상들이 등장했습니다. 조각된 얼굴에는 움푹 팬 흔적과 비대칭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작가는 그 얼굴을 매끄럽게 복구하지 않았습니다.
상처를 가린 얼굴보다 상처를 간직한 얼굴이 역사를 더 정확하게 증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복은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이 아닙니다. 빼앗긴 물건을 돌려주는 일에서 시작하되, 누가 말할 권리를 가졌는지 다시 묻고 끊어진 관계를 새롭게 엮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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