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과 예술가의 탄생
인간은 왜 그림을 그리는가.
창조하기 위해서인가,
이미 창조된 세계에 응답하기 위해서인가.
전시장 한가운데 거대한 구조물이 서 있다.
강철은 빛을 받고, 버려진 나무는 다시 벽이 되며, 흩어진 사물은 이전에 없던 질서를 이룬다. 그러면 우리는 거의 습관처럼 이렇게 말하죠.
“와, 예술가가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네.”
그 말은 듣기는 좋을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그 문장의 주어로 두지 않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개역개정 창세기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빛과 어둠, 물과 땅, 씨 맺는 채소와 하늘의 광명체, 생명과 안식—이 모든 것이 인간보다 먼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같은 장 27절은 인간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우리가 작은 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세기 2장 15절이 그 일의 내용을 더 분명히 합니다.
경작하고 지키는 일. 무에서 유를 발명(invent)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동산을 돌보는 일입니다. 조금 뒤에 아담은 짐승들을 “창조”하지 않습니다. 이미 있는 것들에게 '이름'을 붙입니다. 이름은 소유증서가 아니라 관계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복음주의적 기독교 예술관의 첫 질문은 ‘얼마나 새롭고 충격적인가’가 아닙니다.
‘무엇을 받았으며, 그것을 어떤 세계로 되돌려주는가’입니다.
'창의성'은
'소유권'이 아니라 '바카라임'입니다.
예술적 참견시점은 바로 여기, 받은 세계 한가운데서 조용히 끼어드는 자리에서 열립니다.
-----------------
2017년 제57회 베니스비엔날레 영국관으로 가보자. 영국을 대표한 작가는 필리다 발로(Phyllida Barlow), 작품 제목은 《folly》였다.
영국관은 대칭과 질서, 균형을 강조하는 신고전주의 건축물이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 익숙한 질서는 무너진다. 관람객을 맞이하는 것은 단정하게 놓인 조각이 아니라 전시실을 거의 점령해 버린 거대한 구조물들이다. 중앙 전시실에는 기둥을 닮은 덩어리들이 빽빽하게 솟아 있다. 일부는 천장에 닿을 듯 치솟고, 일부는 쓰러지거나 서로 기대어 있다. 관람객은 작품을 멀리서 감상할 수 없다. 구조물 사이로 몸을 비틀어 들어가고,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며, 때로는 길을 잃은 사람처럼 출구를 찾아야 한다. 이곳에서 작품 감상은 눈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몸의 크기와 보폭, 긴장과 망설임까지 작품의 일부가 된다.
발로가 사용한 것은 대리석이나 청동처럼 영속성을 상징하는 전통적인 조각 재료가 아니었다. 목재와 합판, 철망, 천, 시멘트와 석고, 폼과 페인트 등 건축 현장이나 작업실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재료들이었다. 표면도 매끄럽게 마감하지 않았다. 흘러내린 페인트와 거칠게 바른 시멘트, 드러난 골조와 이음매가 제작 과정의 흔적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그런데 이 보잘것없는 재료들이 영국관 안에서는 건축물을 압도할 만큼 거대한 존재로 변한다. 값싼 재료이지만 규모는 기념비적이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이면서도 공간을 완강하게 지배한다. 바로 이 모순이 《folly》의 힘이다.
제목인 ‘folly’에는 여러 의미가 겹쳐 있다. 서양 정원사에서 폴리(folly)는 실제 용도보다 풍경을 장식하기 위해 세운 작은 건축물을 뜻한다. 고대 신전이나 폐허, 탑처럼 보이지만 실용적 기능은 거의 없는 일종의 건축적 환영이다.
동시에 영어에서 folly는 어리석음, 허영, 무모한 행동을 의미한다. 발로의 작품은 이 두 의미 사이를 오간다. 거대한 기념비처럼 보이지만 영원히 보존될 재료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화려한 축제처럼 보이지만 이미 붕괴가 시작된 폐허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작품은 우리에게 묻는다.
“영원할 것처럼 세워 놓은 인간의 기념비는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는가?”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