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의 또 다른 의미

​부제: 돈도 돈이지만 기억의 한 부분

by장호현

​가계부는 한 가정의 살림 규모와 수입, 지출을 적는 장부를 말한다. 내가 적는 가계부는 한 가정도 아니고 단지 개인의 지출 기록이며, 수입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하지 않는다. 지출 내역만 적을 뿐이다. 수입이 없어서가 아니다. 매달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을 받고, 가지고 있는 일부 자산을 주식과 펀드에 투자해 일부 수익을 실현할 때면 수입이 들어오곤 한다. 그러나 기록까지 할 필요도 없고 내역이 단순해 머릿속으로 쉽게 계산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가계부를 적은 목적 자체가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춰 살림살이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지출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 가계부가 주는 의미는 색다르다. 가끔 가계부 앱을 열어본다. 돈을 언제, 어디에, 얼마를 썼는지 알 수 있으며, 동일한 항목으로 작년에는, 또 재작년에는 얼마를 썼는지 쉬이 알아볼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 그날, 무엇을 했는지 되짚어보기 위해서다. 아직 기억이 흐려질 만한 나이는 아니다. 물론 어떤 이와 비교해도 기억 하나는, 특히 숫자 기억 하나는 자신 있는 나다.


​하지만 일상이 너무 잔잔하고 평온하다 보면 어제가 오늘 같고, 지난 일요일이 또 이번 주 일요일과 같다. 하루하루의 풍경이 너무나 비슷하다 보니 내가 무엇을 했는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가물가물할 때가 종종 있다. 따로 알아볼 방법도, 따로 확인할 길도 없다. 온전히 내 기억에 의존할 뿐이다.


​그러나 그 기억의 단절을 다정하게 메워주는 친구가 바로 가계부다. 가계부가 내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시시콜콜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대충 훑어보면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부분을 대략이나마 짐작하게 된다. 게다가 내가 되살려야 하는 기억이 꼭 거창하거나 정확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대개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문득 멍하니 앉아 ‘그날 내가 무엇을 했더라?’ 하고 막연한 생각을 할 때면, 어김없이 가계부를 들춰보곤 한다.


​가계부를 쓰는 것은 퇴직하고 나서부터이다. 그전에는 가계부를 쓰지 않았다. 잠시 특정한 기간, 제주도 올레길을 걸을 때나 유럽 여행을 갔을 때, 그리고 퇴직 후 한 달간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를 여행했을 때나 긴 추석 9일 연휴를 맞아 가까운 나라들을 둘러볼 때처럼 특정한 기간에 비용을 얼마나 썼는지 정리하는 차원에서 잠시 써본 가계부가 전부였다.


​퇴직 후에는 솔직히 돈을 얼마나 쓰는지 궁금했다. 현직에 근무할 때는 법인카드를 포함해 카드 세 개를 가지고 있었다. 결제 방식이 조금씩 달랐고 사용하는 용도도 제각각이었다. 고객들을 만나고, 직원들을 만나고, 가족과 친구들을 만날 때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리고 가끔은 만나는 목적에 따라 사용하는 카드가 달라졌다. 업무적인 용도든 개인적인 용도든 마찬가지였다.


​항상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그 생각을 하곤 했다.


​‘오늘은 또 어떤 카드를 사용해야 하나?’


​그렇게 살았기에, 정작 퇴직 후 순수하게 개인적으로는 돈을 얼마나 쓸까? 과연 얼마를 쓰고 지내고 있을까? 내 생활의 실속이 궁금했다.


​지금은 주로 사용하는 카드가 한 장으로 줄었지만, 카드 외에도 지불하는 방법은 몇 가지 더 있다. 지역에서만 유용하게 쓰이는 울산페이, 미리 충전해 둔 두 개의 포털사이트 페이, 간편한 계좌이체, 그리고 가끔 쓰는 현금까지. 이 모든 것을 조목조목 적어보아야 내 살림의 진짜 모양새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가계부를 쓴다고 해서 사용하는 금액이 드라마틱하게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용돈의 쓰임새는 거의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고, 상당 부분은 매달 고정적으로 반복되는 항목들이기 때문이다. 지출을 줄이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사용한 내역을 차곡차곡 적어 내리며 오늘까지 쓴 금액을 눈으로 확인할 때면, ‘아, 이번 달엔 좀 많이 썼구나. 남은 날들은 좀 줄여야겠다’ 하는 경각심을 갖게 된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면 아무래도 지출이 조금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물론 크게 달라지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처음 가계부를 쓸 때부터 이렇게 오랫동안 기록을 남기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 몇 달만 바짝 써보면 대략 어떤 곳에 얼마 정도를 사용하고, 한 달 동안 총지출하는 금액은 어느 정도가 될지 감이 잡힐 줄 알았다. 사실 그게 전부였다. 예상했던 대로 몇 달간 써보니 대략적인 지출 규모가 손에 잡혔고, 더 이상 가계부를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만두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어제 점심엔 뭘 먹었지?’ 하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는데 머릿속이 하얘지며 까물까물했다. 혹시나 하는 호기심 반, 장난 반으로 가계부를 열어보았다.


​14,200원.


사용 내역은 점심과 커피라고 적혀 있었다. 11,000원짜리 정식과 3,200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 단출한 기록을 보는 순간, 그 집의 정갈한 밥상과 은은하던 커피 향이 선명하게 살아났다. 그것은 오직 나만이 아는 그날의 풍경이었다.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다듬으려고 예약을 하려는데, ‘내가 마지막으로 미장원에 갔던 게 언제였더라?’ 싶을 때도 가계부만 보면 아주 쉽게 답이 나온다.


​차가 먼지도 뒤집어쓰고 지저분해져서 간단히 자동세차를 하고 말까, 아니면 마음먹고 손세차를 한번 시원하게 맡길까 망설여질 때, ‘마지막으로 손세차를 한 지가 얼마나 되었지?’ 궁금해지면 역시 가계부를 펼치면 된다. 언제 누구의 손길에 차를 맡겼는지 손쉽게 알 수 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 둘과 가끔 만나 점심이나 저녁을 함께할 때도 가계부는 훌륭한 기억의 나침반이 되어준다. 모임 약속을 잡으면서 ‘지난번에 우리가 언제 만났더라?’ 궁금해질 때 가계부를 펼치면 정확한 시기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 셋은 모두 정년퇴직을 한 동병상련의 나이다. 만나면 세 명 중 한 명은 주로 진득하게 잘 들어주는 편이고, 나머지 두 명은 서로 자기가 먼저 이야기를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특히 얼큰하게 술 한잔이라도 걸치는 날에는 서로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이 부딪히고 겹치며 흥이 최고조에 달하곤 한다.


​말도 많고 흥도 많아 정신이 하나도 없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간들이 참으로 즐겁고 유쾌하다. 무엇보다 긴 설명이나 장황한 서두를 덧붙이지 않아도 눈빛만 보면 서로의 꿍꿍이나 속내를 다 알아채는,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서로를 너무나 잘 알기에 가능한 편안한 자리다.


​거의 만나는 장소나 코스가 일정하기 때문에 택시비 지출 내역만 확인해도 그날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지고, 그날 기분 좋게 내가 밥을 산 날이면 가계부의 숫자가 더더욱 선명하게 그날의 웃음소리를 불러일으킨다.


​예전 온라인 게임 후배와 소주 한잔 기울였던 날은 정확히 언제인지, 갑자기 오른 실비보험 납부 금액을 보며 ‘작년에는 내가 보험료를 얼마를 냈었지?’ 비교해 볼 때도 유용하다. 매년 돌아오는 건강보험료, 자동차세, 재산세 고지서의 금액 변동도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가끔 찾아가는 고향 선산에는 최근에 언제 다녀왔는지, 몇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들르는 울산병원에는 가장 최근에 언제 다녀왔는지 ……. 이 모든 일상의 사소한 행적이 가계부 속 깨알 같은 글씨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따로 두꺼운 일기를 뒤지거나 다른 기억의 저장소를 헤매지 않아도 가계부만 보면 너무나 쉽게 퍼즐이 맞춰진다. 가계부를 보았는데도 혹시 날짜가 확실하지 않거나 더 구체적인 정황이 필요할 때는, 예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사소한 일정도 놓치지 않으려고 적어두는 캘린더와 함께 대조해 보면 알고자 하는 대부분의 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돈과 관계되지 않는 게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의식주를 해결하는 일부터 마음을 나누는 만남, 가벼운 외출과 취미 생활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발자국은 언제나 소비의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렇다 보니 가계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숫자들이 아니다. 돈 그 자체보다, 그 돈의 흐름과 맞물려 있는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과 감정의 파편들을 간직하기에 가계부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한때 ‘이제 그만 쓸 때가 되었다’며 덮으려 했던 가계부였지만, 이런 소소한 재미와 쓸모를 발견한 뒤로는 계속해서 입력하고 있다. 여러모로 내 삶의 소소한 궁금증들을 시원하게 풀어주고, 무엇보다 잊혀 가던 나날의 흔적들을 조용히 일깨워주는 참으로 고마운 친구임이 분명하다.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매일의 사소한 기록들이 차곡차곡 쌓여 살림살이를 효율적으로 다듬어줄 뿐만 아니라, 일상 속 망각이라는 늪에서 나를 가끔씩 건져 올려주는 것이다. 아마도 이 소박하고 다정한 습관은 앞으로도 쭉 이어지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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