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여행에서 계획여행으로
싱가포르에서 약속한 것이 하나 있었다. 한국에 오면 캠핑을 가자고.
우리는 코로나 때 캠핑을 시작했다. 박물관도 도서관도 갈 수 없던 시절, 야외로 나가야 했다.
차박과 피크닉으로 시작해서 결국 타프와 텐트를 치는 단계까지 갔다.
사실 나와 아내는 그렇게 자연친화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여행을 갈 때도 숙소 화장실 컨디션부터 챙겨보는 사람들이니까.
그런데도 캠핑의 매력에 빠졌고, 아들은 그 매력을 우리보다 더 진하게 느꼈다. 싱가포르로 떠나며 가장 아쉬워했던 것 중 하나가 캠핑이었다.
우리가 떠나는 이유
여행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고, 아내와 아들도 마찬가지다.
이유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결국 비슷한 지점에 닿아 있다. 일상을 벗어나는 것,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경험을 만나는 것. 특히 음식.
캠핑에서는 불을 피워놓고 앉아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좋다. 조용해도 좋고, 깊은 대화를 나눠도 좋다.
여행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공간 속에 놓인 우리의 모습이 좋다. 아내와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모르는 길을 같이 찾아가는 설렘도 좋다.
아들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가장 행복한 건 여행 가서 맛있는 거 먹을 때." 굳이 여행을 언급한 건, 평소엔 나와 밥 먹을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 육아휴직 중에도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아빠와 얘기를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늦지 않게 이 시간을 더 가질 수 있어서, 고맙다.
캠핑 준비, 생각보다 할 일이 많다
캠핑은 막상 가는 것보다 준비가 일이다. 대부분의 장비를 정리하고 떠났던 터라, 4~5년 사이 많은 것들이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손재주가 좋지 않은 나는 힘쓰는 건 잘해도 그 외엔 영 서툴다. 그래서 이번엔 좀 더 쉬운 에어텐트를 알아보고 구입했는데, 이마저도 아직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첫 캠핑은 텐트와 필수 장비만 새로 사서 떠났다. 역시나 가서 보니 부족한 게 또 생겼다.
그래도 오랜만에 자연 속에서 밥을 먹고 불을 피우고 하늘을 보는 시간은 그 자체로 만족스러웠다.
휴직을 하니 금요일 출발 2박 3일 캠핑도 가능해졌다.
똑같은 보드게임도 텐트 안에서 하면 분위기가 다르고, 똑같은 삼겹살도 캠핑장에서 먹으면 맛이 다르다.
얼마 전 다녀온 캠핑 이후 가을까지는 잠시 쉬기로 했다.
후속 캠핑장까지 예약해뒀던 나를 아내가 다시 한번 말렸다. 휴직은 나만 한 것이었지, 아내와 아들의 일정까지 비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번개여행에서 계획여행으로
여행 준비는 캠핑보다 더 즐겁다. 정확히는 가기로 정하고 준비하는 그 시간이 달콤하다.
지난 4년의 여행은 늘 급작스러웠다.
이번 주말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서면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비행기표와 호텔만 예약하고, 금요일 저녁 출발해서 일요일 밤 돌아오는 번개여행이었다.
동남아 허브 공항이 있는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 가족이 찾아낸 유일한 일탈 방법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유튜브로 도시를 공부하고, 매일 밤 다음 날 일정을 짜는 식이었다.
이번엔 달랐다. 좀 더 긴 호흡으로, 효과적이고 경제적으로 준비하고 싶었다.
휴직 동안 여행을 계획하는 과정 자체가 나의 새로운 프로젝트가 됐다. 출발 전 가족에게 계획을 공유하고 의견을 받아 수정하는 과정이 의외로 즐거웠다.
그렇게 5월엔 이탈리아를 다녀왔고, 한 달 후엔 상하이를, 휴직 마지막엔 영국을 계획하고 있다.
중간중간 국내 여행도 끼워 넣는다.
싱가포르에 살 때는 차로 멀리 달릴 일이 없어서 일부러 쿠알라룸푸르까지 가곤 했는데, 한국에서는 남해안이든 강원도든 마음껏 달려서 바다와 산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먹는 것과 이야기
혼자 떠나는 여행이 아니니, 기획의 출발점은 함께 가는 사람의 취향을 이해하는 것이다.
회사 일도 다르지 않다. 발표는 오디언스를, 프로젝트는 이해관계자를, 마케팅 전략은 타깃 소비자를 생각하며 준비하는 것처럼.
다행히 우리 가족 여행의 코어는 명확하다. 첫 번째는 '먹는 것'. 맛집을 찾는 것을 넘어 시장을 구경하고 식재료를 사서 직접 해 먹어보는 것까지.
두 번째는 '역사와 이야기'. 박물관을 찾고, 음식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다닌다.
그래서 가끔 우리 여행에 참여자가 늘어나면 우리의 먹부림 일정에 참여자들은 힘겨워하기도 한다.
아이는 이미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가끔은 아이가 여행에서 더 많은 걸 기억해주길 바란다.
내가 느끼는 만큼 너도 느꼈으면, 그 감정을 나눠줬으면 하는 마음. 그런데 기대만큼 돌아오지 않을 때 힘이 빠지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이 순간들이 결국 아이의 인생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는 것을.
돌아보면 아들은 이미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행복해하고, 표현하고 있었다. 굳이 다시 캐물으니 대답하지 않았을 뿐.
휴직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 것이 여행을 떠나고, 또 기획하는 일이다.
조금은 긴 호흡으로 떠나는 이 시간들이 우리 셋의 머리와 가슴에 좋은 흔적으로 남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