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조력자가 된다는 것

by제이스의 시선


결혼 15년차, 육아 12년차.

그 시간 동안 아내는 집안일과 육아를 한 번도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회사를 다닐 때도, 개인 프로젝트를 할 때도. 슈퍼 워킹맘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다.


이번 육아휴직의 목적은 어쨌든 아내를 돕는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 목적조차 잠시 방향을 잃었지만 - 그 이야기는 지난 글에서 했다.

아내가 자신의 프로젝트에 집중할 수 있으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집에 있는 내가 오히려 짐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고민에서 시작했다.


재료가 아깝다는 말

신혼 초, 주말 아침에 내가 밥을 해주는 아름다운 그림을 상상한 적이 있었다.

어디선가 간단해 보이는 온라인카지노 레시피를 보고 무려 2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썼는데, 내가 먹어도 정말 별로였다.

아내는 그래도 먹어줬다. 신혼 초라 그랬을 것이다. 지금이었다면 안 먹었을 것이다.


그 이후 아내는 말했다. 재료가 아까우니 요리는 하지 말라고. 그렇게 주방에서 나의 역할이 정해졌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 우리 부부에게 하나의 약속이 생겼다. 서로 잘할 수 있는 것을 하자.

둘 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효율을 추구하는 성격이라, 이 원칙은 우리 사이를 잘 정의해주고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의 실마리가 되어왔다.

이번에도 그 기준으로 생각했다.


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첫 번째 육아휴직은 오히려 단순했다. 두 돌도 안 된 아이를 보육하면 됐다. 이번엔 아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니 할 일이 별로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집안일에서 내가 맡을 것들을 정리하고, 보육 대신 교육에 내가 기여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시작은 학교 앱을 설치하는 것부터였다. 하나씩 들여다보니, 학교에서 보내는 공지가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아들은 수영과 농구만 학원 활동을 하는데 그 스케줄 짜는 게 이렇게 복잡한 일인지도 몰랐다.

싱가포르 국제학교 때도 공지와 행사가 훨씬 많았는데, 그때 나는 아예 신경을 쓰지 못했다. 몰랐던 게 아니라, 몰랐다는 것도 몰랐던 것이다.


한국에 오면서 아들에게 핸드폰을 사주지 않기로 했다. 운동 외에 학원도 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학교가 끝나고 아들의 시간을 내가 함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역할이 됐다.

다행히 이 부분이 아내의 시간 확보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있다.


내가 더 잘 못하는 것

아내의 프로젝트 자체에 도움이 되고 싶었지만, 아내가 나보다 훨씬 잘 알았다.

나는 디지털 마케팅을 할 줄 알지만 크리에이터는 아니었다. 내 조언이 아내의 작업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서로 다른 영역에 있다 보니, 의도치 않게 아주 도움이 되는 인사이트를 주고받을 때가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집안일은 순탄치 않았다. 나는 마이너스의 손이라 불릴 만큼 뭔가를 건드리면 사고를 잘 친다.

게다가 집에 오면 모든 에너지가 꺼지는 스타일이었다. 회사에서의 나와 집에서의 나는 거의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 달여가 지나면서 그것도 풀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쏟는 에너지의 절반만 집에서 써도 아내의 조력자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집에 들어서면 모든 걸 끄던 습관을 바꾸면 되는 일이었다. 말은 쉽지만, 바로 되지는 않았다. 공간이 가지고 있는 힘이었다.


하루 종일 함께 있다는 것

육아휴직을 하면 하루 종일 함께 있게 된다. 결혼 생활의 어려움 대부분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다가 갑자기 같은 공간을 쓰게 되면서 온다고 생각한다.

휴직을 하면 그 리스크가 더 커진다.


그래서 우리는 규칙을 만들었다. 아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에는 서로 각자의 작업에 집중한다.

아내는 프로젝트, 나는 글쓰기와 독서. 집에 화이트보드를 사서 일정과 할 일을 적고, 서로에게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적기 시작했다.


휴직 초반엔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을 맞춰가며 조금씩 우리만의 리듬이 생겼다.


싱가포르에서는 내가 아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일 외의 것은 신경 쓰지 않았고, 못했다. 아내는 그것을 묵묵히 받아줬다. 그 노력이 있어 우리가 버텼고, 이제는 내가 아내를 도울 차례였다.

처음엔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걸 배우고 실천하는 중이다.


나와 아내는 둘 다 캐릭터가 강하고 자기 주장이 있는 사람이다.

연애 때부터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싸워왔다. 그 시간이 쌓여 우리는 조금씩 더 단단해지고 있다.


조력자라는 말보다, 사실 내가 원하는 건 이것이다.

각자의 삶을 살아갈 때 옆에서, 뒤에서, 때로는 앞에서 함께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서로가 되는 것. 그러기 위해 나부터 잘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커리어의 중요한 시점이 있듯, 결혼 생활에도 중요한 시점이 있다.

지금이 그 시점이라는 생각에, 이 육아휴직이 더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