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우리는 종종 '바카라임감'이나 '성실함'이라는 근사한 명분 뒤로 내 진짜 감정과 행복을 미뤄두곤 합니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으니 잘 살고 있는 거겠지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문득 쓸쓸함이나 이유 모를 허무함이 밀려올 때도 있죠.
오늘 소개해 드릴 소설은 평생을 '완벽'이라는 가치를 위해 살아온 한 남자의 여정을 그린 작품,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평생을 영국 저택 '달링턴 홀'의 집사로 살아온 '스티븐스'입니다.
그는 평생 완벽한 집사로서 '품위'를 지키는 것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삼아왔습니다.
그가 추구하는 집사란 주인의 뜻을 완벽하게 받아들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통제하고 절제할 줄 아는 '품위'있는 집사였습니다.
어느 날, 새로운 주인 페레데이씨의 권유로 생애 첫 6일간의 자동차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스티븐스는 과거 함께 일했던 옛 동료 '켄턴 양'을 만나러 가면서 지난날의 기억들을 하나씩 복기하기 시작합니다.
켄턴 양을 만나면 다시 일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보려 했습니다. 인력이 부족했고, 유능한 일손을 확보하고 싶다는 거였죠.
합리적이고 직업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적어도 스티븐스 본인은 그렇게 믿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읽는 사람은 금세 알아차립니다. 이 여행이 정말로 인력을 충원하기 위한 것인지.
스티븐스는 켄턴 양의 편지를 몇 번이고 꺼내 읽으며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끝없이 상상을 합니다.
여행의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서부 지방으로 차를 몰아가다 중간에 켄턴 양에게 들러 정말 여기 달링턴 홀의 일자리에 복귀할 생각이 있는지 그녀의 본심을 직접 탐색해 볼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착오가 없도록 하기 위해 켄턴 양이 보내온 편지를 대여섯 번 더 읽었다. 그러므로 그녀가 모종의 암시를 보내왔다는 판단이 나만의 상상에 불과할 가능성은 결코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날 그런 상황들을 되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들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와 켄턴 양의 관계에서 엉뚱한 것들을 솎아 낼 수 있는 날이, 달이, 해가, 끝없이 남아 있는 줄만 알았다. 이런저런 오해의 결과를 바로잡을 기회는 앞으로도 무한히 많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처럼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모든 꿈을 영원히 흩어 놓으리라고 생각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오늘 밤에 그녀의 편지를 다시 읽어 본 결과, 내가 그녀의 몇 구절을 좀 현명하지 않게 해석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는 점도 이쯤에서 밝혀 두는 게 좋겠다. (중략)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 내일이면 켄턴 양 본인에게서 확인하게 될 마당에, 지금 그녀의 의사가 무엇일까 끝없이 상상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바카라의 저자 가즈오 이시구로는 독특한 이력을 지녔습니다.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났지만 여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영국으로 건너가 줄곧 그곳에서 자라고 글을 써왔습니다. 원래는 2년 정도 머물 예정이었지만 정착하게 되면서 국적까지 취득하게 되었죠.
일본인이라는 혈통과 영국인이라는 정체성 사이, 그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던 삶.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체성'이라는 테마를 이토록 섬세하게 다룰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소설은 그에게 1989년 영국 최고 권위의 부커상을 안겨주었고,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지며 그를 현대 영미권 문학의 거장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이야기는 스티븐스의 1인칭 독백으로 서술됩니다. 그런데 주인공 스티븐스가 내뱉는 무덤덤한 말들과 실제로 느껴지는 감정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합니다.
바로 저자가 자주 사용한다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기법입니다.
끊임없이 '나의 선택이 옳았고, 내 인생은 의미 있었다'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말들이 이어지지만 그 틈새에서 그가 차마 말하지 못하는 감정을 읽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가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켄턴 양이 마음을 돌려 떠나가 버리는 순간에도 '집사의 품위'라는 명목으로 감정을 통제했습니다.
사적인 슬픔이나 사랑보다 직업적 본분이 월등히 우위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모든 것을 바쳐 평생 맹목적으로 섬겼던 주인 '달링턴 경'은 실상 정치적으로 무지했습니다. 그 결과 나치 독일의 부역자로 이용을 당하며 가문 전체가 몰락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죠.
주인의 품격이 마치 자신의 것인 듯 살아왔던 스티븐스.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아왔다고 믿어왔는데. 그가 삶에서 진짜 지키려 했던 품위라는 건 무엇이었을까요?
여행의 끝자락, 쓸쓸히 선착장에 앉아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는 스티븐스에게 옆자리의 한 노인이 나지막이 말을 건넵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이 문장은 소설 속 스티븐스뿐만 아니라,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가며 후회를 안고 사는 모두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비록 엉망이 된 과거를 돌릴 수는 없지만, 남아 있는 날을 어떻게 보낼지는 여전히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었습니다.
스티븐스는 다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새로운 주인을 위한 농담을 연습하려 마음먹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자기 역할에 갇힌 모습이기도 하면서, 무너진 삶을 지탱하려는 의지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나는, 달링턴 경께 모든 걸 바쳤습니다. 내가 드려야 했던 최고의 것을 그분께 드렸지요. 그러고 나니 이제 나란 사람은 줄 것도 별로 남지 않았구나 싶답니다.
'성실하게 살아야지', '남들에게 인정받아야지'라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소설 속 스티븐스와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주인공이 느꼈던 딜레마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바카라임'이나 '신념'이라는 근사한 말들이 내 솔직한 욕망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기 위한 도피처였는지 모르니까요.
만약 살면서 그때 다르게 행동했더라면..이라는 후회가 들고 마음이 먹먹해질 때, 스티븐스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보시면 어떨까요?
비록 지나온 삶에 되돌릴 수 없는 후회가 남아있다 할지라도, 남아 있는 날을 향해 다시 걸어가는 것.
우리가 품어야 할 최소한의 용기이자 희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바카라 읽는 제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걸어온 길에 후회는 없다고 확신할 수 있나요?
-제이의 한마디-
오늘도 한 권의 소설을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바카라은 혼자 읽을 때보다 함께 이야기할 때 더 오래 남는 것 같아요.
여러분은 이 작품을 어떻게 느끼셨나요?
짧은 감상이나 마음에 남는 장면도 좋습니다. 댓글로 편하게 이야기 나눠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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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글이 올라올 때 바로 알려드릴게요♡
-바카라 읽는 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