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키건 <푸른들판을 걷다> 다산바카라방
지난주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에 이어 이번에도 단편집을 들고 왔습니다.
짧은 이야기들이지만 바카라을 덮은 뒤에도 오래 마음에 남는 클레어 키건의 작품입니다.
저에게 클레어 키건은 조금 특별한 작가입니다.
<맡겨진 소녀>를 읽고 완전히 반해 <이처럼 사소한 것들>, <푸른 들판을 걷다>, <너무 늦은 시간>, <남극>까지 국내에 출간된 작품을 모두 모았거든요.
2023년 처음 <맡겨진 소녀>가 한국에 소개되었을 때, 출판사인 다산바카라방에서는 '최소 부수'를 판매목표로 잡았다고 하는데요.
키건의 바카라은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뒤이어 나온 <이처럼 사소한 것들>까지 연달아 흥행하면서 바카라 한권이 아니라 작가 이름 자체가 각인이 되었습니다.
결국 다산바카라방은 27년동안 키건이 썼던 다섯권을 한국어로 완간을 했고, 저도 그 바카라들을 모두 소장할 수 있게 되었네요^^
이 정도면 덕질이라고 해도 되겠죠?
클레어 키건은 아일랜드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소설에 차분하고 서늘한 시골 풍경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키건은 27년 동안 단 다섯 권만 발표했을 만큼 문장 하나하나를 극도로 아끼는 작가이기도 한데요. 화려한 문장보다 삶의 진실을 담아내는 힘, 그것이 제가 그녀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한 남자가 젊은 남자에게 딸을 빼앗긴다. 한 여자는 아들이 별것도 아닌 여자에게 자신을 내던지는 모습을 본다. 그들은 반쯤 그렇게 생각한다.
표제작 <푸른 들판을 걷다>는 언뜻 평화로운 풍경이 떠오르지만, 그 안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슬픔이 흐르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아일랜드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가톨릭 사제 '스택'입니다.
그는 오늘 성당의 사제로써 한 커플의 결혼식을 진행 하는 날 입니다. 오르간 연주자가 바흐의 토카타를 연주하고 있고 모두들 신부가 입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번 더 곡이 연주되고 있지만 어쩐지 신부가 좀처럼 입장하지 않습니다. 하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할 즈음, 신부는 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모습을 드러냅니다.
식이 무사히 끝나고 하객들의 식사가 마무리 될 무렵, 성당 한편에서는 가벼운 파티가 벌어졌습니다. 웃음소리가 오가는 평범한 축하 자리였죠.
바로 그때, 신부의 진주목걸이가 끊어집니다. 줄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구슬들이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졌습니다.
사제 앞으로 굴러온 진주알 하나. 그 구슬을 집어들어 신부에게 건네는 순간, 눈물이 가득한 그녀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오늘 결혼한 그 여인은 과거 사제가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두사람은 지금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부가 양손을 내밀고 서 있다. 그가 신부의 손에 진주를 내려놓자 그녀가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눈물이 고여 있지만 그녀는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눈을 깜빡여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기만 하면 사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여기서 달아나리라. 적어도 사제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던 다음 날 아침에 그들은 창문을 열어둔 채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는 그녀의 주근깨가 바람에 다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같은 날 아침 늦게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사제직을 내려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과 닿은 것은 3년 만인데, 모르는 사람의 손이 깜짝 놀랄 정도로 부드럽게 느껴진다. 어째서 상처보다 부드러움이 사람을 훨씬 더 무력하게 만들까?
왜 많은 사람들이 아일랜드의 정서가 한국의 '한'과 닮았다고 말하는지 알 것도 같았습니다.
이루지 못한 사랑, 끝내 삼켜야 했던 마음, 평생 품고 살아가는 후회. 이런 감정은 나라가 달라도 결국 같은 언어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는 <물가 가까이>도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일본의 유명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2004년 외국 작가들의 단편을 엮어 <생일이야기>라는 선집을 냈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 바카라의 개정판에 이 작품을 직접 골라 실었다고 합니다.
클레어 키건이 국내에 알려지기 훨씬 전부터 그녀의 작품성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죠.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면서도 오직 물질적 성취와 기준으로만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 그리고 끝내 마음을 내어주지 않은 채 은근한 모욕을 던지는 새아버지. 그 가운데에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긴 채 자라온 한 청년의 이야기는 바카라을 덮고도 쉽게 잊히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품조차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할 때, 사람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요?
인물의 감정은 직접 설명되지 않지만 파도 소리와 바람의 온도 같은 풍경으로 스며들어 오래 마음을 맴돌았습니다.
그는 늘 그러듯 해안으로 헤엄쳐 돌아가기 전에 여기서 쉴 수 있다. 바닥의 모래를 느끼려고 발을내려본다. 머리 위로 두꺼운 파도가 덮쳐 그를 깊은 물속으로 빠뜨린다.
이 바카라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에는 극적인 사건도, 화려한 반전도 없습니다. 대신 인물들의 사소한 행동과 짧은 대화, 그리고 침묵의 순간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읽는 내내 마음 깊이 남았던 감정은 '말하지 않는 슬픔'이었습니다. 김애란의 단편과 닮은 듯하면서도 또 다른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혼하는 옛 연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던 사제도, 애증의 가족을 뒤로하고 떠나는 사람도, 모두 가슴 아픈 시간을 지나지만 원망하지 않습니다. 키건은 침묵과 여백만으로도 가장 깊은 상실을 독자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타이밍을 놓쳐서, 용기가 없어서, 혹은 말해봤자 달라질 것이 없을 것 같아서.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삼켜본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으신가요.
그렇게 삼킨 말들은 우리 마음 어딘가에 가라앉아 후회가 되기도 하고, 체념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금의 나를 만든 단단한 마음의 모양이 되기도 합니다.
클레어 키건은 그렇게 가라앉아 있던 말들을 조용히 건져 올립니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은 짧지만 더욱 오래 남습니다.
화려한 문장 하나 없이, 침묵만으로 마음을 흔드는 소설.
하루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바카라이지만, 다 읽고 나면 며칠은 그 이야기 속에 머물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난 시간, 당신이 끝내 삼켜야 했던 말은 무엇이었나요?
지금까지 바카라 읽는 제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제이의 한마디-
오늘도 한 권의 소설을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바카라은 혼자 읽을 때보다 함께 이야기할 때 더 오래 남는 것 같아요.
여러분은 이 작품을 어떻게 느끼셨나요?
짧은 감상이나 마음에 남는 장면도 좋습니다. 댓글로 편하게 이야기 나눠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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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카라 읽는 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