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

경계의 아이(境界の子) - 8화

by아이작 유

사이트릭스의 밤은 길었다. 이곳의 밤은 단순히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는 천체 현상이 아니라, 전 세계 서버의 연산이 가장 치열해지는 소음과 열기의 집약체였다. 판타지아의 네온사인은 거대한 뇌세포의 시냅스처럼 규칙 없이 명멸했고, 사람들은 그 빛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망각한 채 춤을 췄다.


세호는 판타지아의 시끄러운 메인 스트리트를 벗어났다. 화려한 그래픽의 밀도가 급격히 낮아지는 서쪽 끝단, 데이터의 해상도가 떨어져 풍경이 마치 물 젖은 수채화처럼 번져 보이는 ‘슬럼 구역’이 그의 목적지였다. 그곳에는 마리가 있었다. 처음 그녀를 본 것은 보름 전쯤이었다. 쾌락을 좇는 인파 사이에서 유독 투명할 정도로 정적인 공기를 두르고 있던 여자. 세호는 빚을 갚기 위해 기계처럼 일하던 밤의 틈새마다 자석에 이끌리듯 이곳을 찾았고, 마리는 늘 같은 자리에서 번진 수채화의 일부처럼 앉아 있었다.


마리의 거처는 낡은 컨테이너를 개조한 듯한 작은 방이었다. 사이트릭스 내에서 이런 공간은 인기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곳에 접속해 웅장한 성이나 초호화 펜트하우스를 누리고 싶어 하지, 현실의 가난을 그대로 복제한 듯한 누추함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는 이곳을 고집했다. 시스템의 간섭이 적어, 가끔은 정전이 일어난 것처럼 주변이 고요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이트릭스라는 거대한 가짜 세계가 허용하는 유일한 ‘여백’이었다.


“왔어요?”


마리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내밀었다. 사이트릭스에서 마시는 차는 사실 0과 1로 이루어진 전기 신호의 조합에 불과했다. 하지만 혀끝에 닿는 찻잔의 미세한 온기, 쌉싸름한 홍차의 향기, 그리고 목을 타고 넘어가는 액체의 질감은 현실의 그것보다 훨씬 선명했다. 제너럴 사이트릭스의 기술은 인간의 감각을 배반할 정도로 완벽했다. 오아시스 구역의 매춘 사업이 막대한 부를 벌어들이는 이유도 바로 이 ‘배반의 완벽함’에 있었다. 뇌가 인지하는 자극이 현실보다 더 강렬하다면, 사람들에게 현실의 육체는 그저 엔트리스를 장착하기 위한 거치대에 불과해지는 것이다.


“오늘은 캐시 환율이 또 올랐더군요. 현실에서 열 시간을 꼬박 일해도 이곳에선 한 시간의 휴식조차 사기 힘들어요. 3억이라는 숫자가 제 목을 죄는 올가미처럼 느껴집니다.”


세호가 낡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젖은 솜 같은 피로가 눅눅하게 배어 있었다. 마리는 대답 대신 그의 옆에 앉아 차가운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감각이 오히려 세호의 과열된 뇌를 식혀주었다.


“세호 씨,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그곳도, 사실은 누군가가 만든 정교한 프로그램이 아닐까 하는. 우리가 느끼는 고통도 사실은 어떤 거대한 실험의 변숫값일 뿐인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프로그래머는 아주 악취미를 가진 사람일 겁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빚을 설정해두고, 마리 씨 같은 사람에게 그런 상처를 준 걸 보면요.”


세호의 쓰디쓴 농담에 마리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사이트릭스의 인공 태양보다 훨씬 따뜻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데이터의 공백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통로였다. 지난 여러 날 동안, 그들은 이런 식으로 침묵을 공유하며 서로의 과거를 조금씩 꺼내놓았다. 마리는 잃어버린 아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실에서 그녀의 자궁은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기능을 상실했지만, 이곳 사이트릭스에서 그녀는 가끔 배 안쪽에서 미세한 진동을 느낀다고 했다. 세호는 그것이 ‘팬텀 리듬’이라 불리는 일종의 뇌파 오류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차마 그 잔인한 진실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이곳에서는 상처조차 데이터로 기록되죠. 하지만 세호 씨가 내 손을 잡을 때 느껴지는 이 맥박은, 시스템이 계산한 것 같지가 않아요.”


마리가 세호의 가슴에 귀를 기울였다. 쿵, 쿵, 쿵. 일정한 박동. 그것은 현실의 육체가 보내는 신호가 엔트리스를 거쳐 이곳 가상 세계에 재현된 것이었다.


세호와 마리의 만남은 오아시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결이 달랐다. 오아시스의 매춘부들이 제공하는 것은 프로그래밍된 쾌락의 정점이었다. 제너럴 사이트릭스는 더 많은 캐시를 긁어모으기 위해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최적의 알고리즘을 개발했고, 사람들은 그 인공적인 황홀경에 중독되어 전 재산을 탕진했다. 하지만 세호와 마리는 여러 밤을 거듭하며 빚의 압박과 유산의 슬픔이라는 밑바닥을 서로에게 보여주었다. 그 과정에서 싹튼 것은 화려한 그래픽이 덧씌워진 욕망이 아니라, 가상 세계의 가짜 피부 위로 흐르는 공기마저 진짜처럼 느끼게 만드는 지독한 유대였다.


그날 밤, 마리의 작은 거처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방 안에는 시스템이 제공하는 판타지아의 화려한 배경음악 대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이 밀도 있게 감돌았다. 두 사람이 나눈 것은 시스템이 설계한 쾌락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서로의 결핍을 채우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자, 죽어가는 영혼들이 나누는 마지막 온기였다.


살과 살이 맞닿을 때 느껴지는 전율은 뇌파 신호를 타고 증폭되었다. 오아시스에서 거래되는 표준화된 쾌락과는 다른,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비정형적이고 무질서한 감각의 충돌이었다. 세호는 마리의 몸 안 깊숙이 자신의 존재를 새기듯 파고들었고, 마리는 그를 받아들이며 현실에서 잃어버렸던 생명의 감각을 다시금 일깨웠다. 가상이라는 껍질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가장 깊은 본질을 만지고 있었다.


마리는 세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방금 전까지 세차게 몰아치던 감각의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기묘한 평온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 평온함 속에서, 마리는 자신의 아랫배 부근에서 시작된 아주 낯설고 이질적인 울림을 포착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녀가 사이트릭스에서 경험했던 그 어떤 시스템적 자극과도 달랐다.


“세호 씨… 방금 느꼈어요?”


마리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세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손바닥을 타고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한 박동이 전해졌다. 쿵. 쿵. 쿵. 그것은 세호 자신의 심장 소리도, 마리의 심장 소리도 아니었다.


마치 아주 깊은 지하에서 들려오는 먼 북소리처럼, 두 사람의 뇌파가 겹쳐진 그 틈바구니에서 새로운 리듬이 싹트고 있었다. 가상 세계에서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오직 생명만이 가질 수 있는 불규칙하고도 강인한 맥동이었다.


세호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뇌파 오류라고 치부하기엔 그 감각이 너무나도 실존적이었다. 3억 원의 빚으로 점철된 그의 현실도, 유산의 아픔으로 점철된 마리의 과거도 이 작은 박동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판타지아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있었지만, 그 빛들은 이제 막 태어난 이 작은 생명의 박동에 비하면 조잡한 전구 불빛에 불과했다.


“우리가… 무얼 만든 걸까요?” 세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리는 대답 대신 그를 더 깊이 껴안았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것은 가상현실이 제공하는 습도 데이터가 아니라,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진짜 슬픔과 환희의 결정체였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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