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숫자에 약할까?

(전투력 시스템과 밸런싱의 함정)

by루니

몇 주 전, 스탯 가중치와 밸런스 설계 강의의 두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첫 시간엔 옛날 MMORPG의 그 지루한 성장 곡선을 시뮬레이터로 보여드렸었죠.

"그 템포를 어떻게 견뎠냐"고 묻던 후배 기획자,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그 강의의 다음 회차였습니다.


이번엔 서버를 따로 세팅할 것 없이, 제가 평소 즐겨 쓰는 방식대로 단일 파일로 짠 HTML 전투 시뮬레이터를 화면에 띄워두고 이런저런 숫자들을 입력하며 결과값을 보여주고 있었죠.


그러다 제가 후배들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다들 요즘 모바일 RPG 만들면 무조건 '전투력(Combat Power)' 시스템 넣잖아. 그거 왜 넣는 거라고 생각해?"


여기저기서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이 튀어나왔습니다.

직관적이잖아요, 유저들끼리 강함을 비교하기 좋으니까요,

성장의 목표를 뚜렷하게 주려고요.


모두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기획자로서, 아니 사람의 마음을 설계하는 시스템 설계자로서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전투력이라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사람은 다차원적인 정보를 한 번에 처리하는 것을 극도로 피곤해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라고 부르죠.

인간의 뇌는 복잡한 계산을 싫어하고, 어떻게든 에너지를 덜 쓰는 방향으로 지름길을 찾으려 한다는 뜻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볼까요.

내 캐릭터의 공격력이 1500, 방어력이 800, 치명타 확률이 15%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보스 몬스터는 공격력이 1200, 방어력이 1500, 회피율이 20%입니다.

자, 내가 이 몬스터를 이길 수 있을까요?


이걸 머릿속으로 계산하려면 엄청난 스트레스가 발생합니다.

'내 치명타가 터진다는 가정하에 저 녀석의 회피를 뚫고...'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옵니다.


그래서 기획자들은 아주 교묘한 마법을 부립니다.

잡하게 얽혀 있는 수십 개의 스탯(체력, 공격력, 방어력, 민첩성 등)에 각각 기획자가 임의로 정한 '가중치'를 곱해서, 단 하나의 깔끔한 숫자로 뭉뚱그려 유저에게 툭 던져주는 겁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네 전투력은 5만 2천이고, 저 몬스터의 권장 전투력은 4만 8천이야. 넌 이길 수 있어."


그러면 유저들은 환호합니다.

숫자의 높고 낮음만 비교하면 되니 마음이 너무나도 편안해지거든요.

이때부터 유저들의 목표는 내 캐릭터가 구체적으로 어떤 특성을 가진 영웅이 되느냐가 아닙니다.

그저 프로필 화면에 찍히는 '전투력 숫자'를 1이라도 더 높이는 데 혈안이 되죠.

그런데... 여기서 밸런싱의 거대한 함정이 시작됩니다.


사실 그날 강의에서, 저도 후배들에게 똑같이 물어봤습니다.

"너희들, 그 전투력 숫자 신뢰해?"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아니라고 답하더군요.


이상하지 않나요?

판단은 전투력으로 하면서, 정작 그 숫자를 믿지는 않는다는 것. 이유를 물으니 한 후배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전투력이라는 건 결국 실제 전투에서의 강함과는 따로 노는, 그저 한눈에 보기 좋게 다 합쳐놓은 '영수증 표' 같은 거라고요.


정확한 비유였습니다.

영수증에 적힌 총액만 보고는 내가 정말 필요한 걸 샀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전투력 숫자만 봐서는 이 캐릭터가 정말 강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총액 하나에 기대어 지갑을 열고, 스탯을 찍고, 매일의 선택을 내립니다.


전투력이라는 숫자는 사실 기획자가 만들어낸 아주 정교한 '환상'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기획자로서 이번 달에 유저들에게 '공격력'을 올려주는 유료 아이템을 팔고 싶다고 가정해 볼까요?

그럼 저는 슬쩍 시스템 내부의 가중치 공식을 건드립니다.

체력 1이 오를 때는 전투력이 10만 오르게 둔 채, 공격력 1이 오르면 전투력이 무려 50이나 폭등하게끔 공식을 비틀어버리는 거죠.


그러면 유저들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내 캐릭터가 원래 맷집으로 승부하는 튼튼한 '탱커'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체력 대신 공격력 아이템을 끼워 넣기 시작합니다.

왜냐고요?

그래야 남들에게 보이는 내 '전투력' 숫자가 뻥튀기되니까요.

실제 전투에서는 방어력이 약해져서 더 쉽게 죽어나가는데도, 유저들은 겉으로 보이는 그 거대한 단일 숫자의 매력에 취해 시스템의 모순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이것이 숫자가 가진 폭력성이자, 단일 지표가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는 무서운 방식입니다.

자, 이제 모니터 밖으로 시선을 돌려 현실 세계를 한 번 바라보겠습니다.

우리는 매일 엑셀 시트 안에서 몬스터의 전투력을 계산하며 살지만, 정작 가장 지독하게 전투력 시스템의 지배를 받는 것은 우리 자신 아닐까요?


30대, 40대를 지나며 지식 노동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어쩌면 무한한 '슬롯적 전투력' 경쟁의 연속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본래 수백, 수천 가지의 고유한 스탯으로 이루어진 다차원적인 세계입니다.

누군가는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치유력)'이 뛰어나고, 누군가는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맷집(방어력)'이 훌륭하며, 누군가는 '유머 감각(매력)'이라는 엄청난 스탯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우리의 현실(시스템)은 이 복잡하고 아름다운 다차원적 스탯을 평가하기 피곤해합니다.

그래서 아주 폭력적이고도 직관적인 슬롯적 가중치를 곱해버립니다.

연봉, 타고 다니는 자동차의 브랜드, 살고 있는 아파트의 평수, 인스타그램의 팔로워 수, 회사의 KPI 등급.

이 몇 가지 단일한 숫자들로 개인의 '슬롯적 전투력'을 뭉뚱그려 계산한 뒤, 이마에 보이지 않는 딱지를 붙여버립니다.

"저 사람의 전투력은 1억 5천만 원짜리네."
"내 전투력은 고작 저 사람의 절반도 안 되는구나."


가장 서글픈 것은, 이 슬롯적 시스템을 설계한 누군가가 정해둔 임의의 '가중치'에 우리가 스스로를 욱여넣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게임은 철저하게 '눈에 보이는 부와 과시'에 엄청난 가중치를 부여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삶의 진정한 균형(밸런스)이 무너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가중치에 맞춰 억지로 스탯을 찍습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따뜻한 저녁 식사(정신력 회복)를 포기하면서까지, 야근을 하고 무리한 대출을 받아 번듯한 차(과시형 공격력)를 삽니다.

그래야만 내 슬롯적 전투력이 조금이라도 더 높아 보일 테니까요.


결국 우리는 게임 속에서 공격력 템을 둘둘 말고 던전에 들어갔다가 한 방에 죽어버리는 몸 약한 탱커처럼,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비고 닳아버린 채 일상을 간신히 버텨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19년 동안 시스템의 밸런스를 깎고 다듬어 온 기획자의 입장에서, 감히 완벽한 밸런스에 대해 정의를 내려보자면 이렇습니다.


좋은 게임은 모든 캐릭터의 전투력이 똑같은 게임이 아닙니다.

좋은 게임은, 방패를 든 탱커는 든든하게 앞장서서 파티를 지켜내고, 칼을 든 딜러는 날카롭게 적의 빈틈을 파고들며, 지팡이를 든 힐러는 상처받은 동료를 따뜻하게 치유할 때... 그 각자의 다차원적인 역할이 온전히 존중받고 보상받는 세계입니다. 전투력이라는 납작한 숫자 하나로 줄을 세우는 순간, 시스템의 생태계는 급격히 무너져 내립니다.


우리가 숫자에 약한 이유는, 내 스스로 삶의 가중치를 정할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남들이 정해놓은 공식에 내 인생의 데이터를 밀어 넣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일은 당장엔 참 쉽고 편안합니다. 하지만 그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시스템이 의도한 대로 착취당하는 톱니바퀴의 삶뿐입니다.


오늘 퇴근길에는, 남들이 내 머리 위에 띄워놓은 그 무거운 '전투력' 숫자는 잠시 지워버리고 내 안의 숨겨진 스탯 창을 조용히 열어보면 어떨까요.

남들의 가중치 공식으로는 0점에 가깝지만, 내 삶의 파티를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당신만의 빛나는 능력치들 말입니다.


숫자는 렌즈일 뿐, 당신이라는 우주의 크기를 담아내기엔 턱없이 작고 초라한 그릇이니까요.

전투력은 진실이 아니라, 누군가 임의로 정해둔 가중치의 결과일 뿐입니다.

그 가중치를 다시 정할 권리는, 원래 당신에게 있었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스마트폰과 서비스들에 숨겨진 또 다른 심리적 함정, 'UX(사용자 경험)와 매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불편함을 모두 없앤 완벽하고 매끄러운 시스템이, 어째서 우리의 생각하는 힘을 빼앗아 가고 있는지 그 서늘한 이면을 들여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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