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와 매끄러움의 이면)
지난 3월 무렵이었습니다. 큰맘 먹고 새 컴퓨터를 들였습니다.
기존에 쓰던 하드디스크는 데이터가 아까워서 그대로 옮겨 쓰기로 했죠.
그런데 케이스를 열어보니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새 컴퓨터 뒤편에는 그 하드를 연결할 선 자체가 없었습니다.
결국 예전 컴퓨터를 다시 열어 선을 하나 뽑아다가, 커넥터 모양을 하나하나 맞춰가며 억지로 이어 붙였습니다.
거기다 하드를 고정하는 자리에도 크기가 안 맞아 들어가질 않더군요.
결국 원래 있던 마운트 자리는 포기하고, 케이스 안 빈 바닥 공간에 하드를 그냥 내려놓는 걸로 타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안쪽 선들이 사방으로 엉켜서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버렸죠.
물리적인 연결이 끝난 뒤에도 전원을 켜자마자 바로 인식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선을 뺐다 꼈다, 커넥터를 이리저리 바꿔 끼우기를 수차례... 한참을 헤맨 끝에야 겨우 내 컴퓨터 창에 낯익은 드라이브 아이콘이 뜨더군요.
손에 먼지를 잔뜩 묻히고 진땀을 뺐지만, 그 순간 묘한 성취감과 뿌듯함이 밀려왔습니다.
얽힌 문제를 내 손으로 직접 풀고 시스템의 통제권을 온전히 되찾았다는 묵직한 감각이었죠.
그러다 문득, 19년 차 기획자의 직업병이 도지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이 모든 과정이 선 하나 꽂자마자 아무런 메시지도 없이 1초 만에 자동으로 세팅되는 완벽하게 '매끄러운' 경험이었다면 어땠을까?
분명 편하긴 했겠지만, 내가 이 복잡한 기계를 이해하고 다루고 있다는 그 짜릿한 성취감은 느낄 수 없었을 겁니다.
게임 회사에서 기획자로 일하면서 제가 가장 많이 들었고, 또 후배들에게 가장 입버릇처럼 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뎁스(Depth)를 줄여라"입니다.
유저가 어떤 보상을 받거나 상점에 들어가기 위해 화면을 세 번 터치해야 한다면, 기를 쓰고 그것을 한 번으로 줄이라는 뜻입니다.
버튼의 위치, 시선의 이동 경로, 터치의 피로도까지 계산해서 유저가 시스템 안에서 아무런 '마찰'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
우리는 그것을 훌륭한 UX(User Experience), 즉 사용자 경험이라고 칭송합니다.
RPG 장르의 퀘스트 시스템을 볼까요.
과거에는 마을 NPC가 "북쪽 숲의 고블린을 잡아와"라고 하면, 유저가 직접 지도를 펴고 헤매며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모바일 게임들은 바닥에 빛나는 화살표를 깔아주는 것을 넘어, 아예 '자동 이동' 버튼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캐릭터가 알아서 산을 넘고 몬스터 앞까지 도착하죠. 길을 잃을 틈도, 헤맬 이유도 완벽하게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참 씁쓸하고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게 모든 불편함을 없애고 최고로 매끄러운 쾌적함을 선물했는데, 정작 유저들은 게임 세계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자동 이동으로 휙휙 지나쳐간 맵의 풍경이 어땠는지, 마을 촌장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마찰이 사라진 세계에서 유저들은 더 이상 모험가가 아니라, 그저 목적지로 짐을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 위의 수동적인 수화물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이 서늘한 매끄러움은 이제 게임을 넘어 우리 현실의 모든 서비스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열어보세요.
복잡한 공인인증서와 비밀번호 입력은 사라진 지 오래고, 지문 한 번 스치거나 얼굴을 비추기만 하면 순식간에 수십만 원이 결제됩니다.
유튜브나 넷플릭스는 내가 다음 영상을 고르기 위해 고민하는 그 짧은 '마찰'의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영상이 끝나기 무섭게 3초 만에 내 취향을 저격하는 다음 영상을 자동으로 재생시켜 버리죠.
IT 기업들은 이것을 '마찰 없는 경험(Frictionless Experience)'이라며 혁신으로 포장하지만, 시스템을 설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 이면의 목적은 너무나도 투명합니다.
유저에게 '멈춰서 생각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결제 직전에 '내가 정말 이 물건이 필요한가?' 고민할 시간,
다음 영상을 보기 전에 '이제 그만 자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를 통제할 틈.
그 불편한 마찰의 공간을 깎고 다듬어 매끄럽게 지워버림으로써, 우리의 이성은 자연스럽게 마취되고 거대한 소비의 깔때기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게 됩니다.
제가 온라인카지노 스토리에서 연재하는 글들 중에 종종 'TRPG(테이블톡 롤플레잉 게임)처럼 살기'에 대한 비유를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TRPG는 요즘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그야말로 불편함과 비효율의 극치입니다.
컴퓨터가 0.1초면 계산할 전투 공식을, 플레이어들이 직접 20면체 주사위를 굴리고 종이에 연필로 숫자를 적어가며 계산해야 하니까요. 행동 하나를 할 때마다 엄청난 마찰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주사위를 굴리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숨을 죽이며 기다리는 3초의 덜컹거림.
그 불편한 시간 속에서 플레이어들은 몰입하고, 땀을 쥐며, 진짜 내 선택에 대한 바카라임을 배웁니다. 매끄럽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삐걱거리는 여정은 나만의 고유한 서사가 됩니다.
좋은 시스템, 훌륭한 밸런스란 무조건 모든 불편함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뛰어난 기획자는 때로는 유저가 가장 중요한 순간에 멈춰 서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의도적이고 건강한 '과속 방지턱'을 설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자동으로 썰어버리는 방치형 액션 게임에서도, 거대한 보스를 만났을 때만큼은 수동으로 회피 버튼을 누르게 만들어야 진짜 카타르시스가 생기는 것처럼 말이죠.
AI가 나의 취향을 나보다 더 잘 알고, 모든 것이 터치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초거대 매끄러움의 시대. 이 거침없는 미끄럼틀 위에서 우리는 어떻게 내 삶의 통제권을 지킬 수 있을까요?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내 삶의 중간중간에 작고 의도적인 '마찰'을 부활시키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영상을 멍하니 보는 대신 검색창에 직접 내가 원하는 키워드를 타이핑해 보는 수고로움. 클릭 한 번으로 즉시 결제하기 전에 하루 정도 장바구니에 담아두며 묵히는 뻑뻑한 시간.
그 작은 덜컹거림들이 모여, 비로소 우리를 남이 설계한 시스템의 톱니바퀴가 아닌 내 삶의 주도권을 쥔 밸런스 기획자로 우뚝 서게 해줄 것입니다.
오늘 밤에는 화면의 매끄러운 스와이프를 잠시 멈추고, 조금은 불편하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종이바카라을 펼쳐보면 어떨까요. 당신 삶의 고장 난 브레이크를 고쳐줄 그 유쾌한 마찰을 즐기면서 말입니다.
다음 화에서는 이 매끄러운 궤도 위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달리게 만드는 '보상 설계'의 심리학에 대해 파헤쳐 보겠습니다.
왜 우리는 뻔한 칭찬 배지와 포인트 시스템에 그토록 맹목적으로 집착하는지, 일상을 뒤덮은 거대한 게임화(Gamification)의 덫을 확인해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