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는 사람의 마음이 만든다

by루니

얼마 전,

이직과 커리어 정리를 위해 지난 19년간 작업했던 기획서와 밸런스 시뮬레이터들을 폴더별로 찬찬히 훑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프로젝트를 거치며 엑셀과 HTML로 짜두었던 전투 로직들이 하드디스크 한편에 빼곡하게 쌓여 있더군요.

그 과정에서 예전에 한참 매달렸던 '디비전 2 시뮬레이터'의 타이틀을 '루트 슈터(Loot Shooter) 전투 시뮬레이터'라는 더 포괄적인 장르명으로 수정하며 포트폴리오를 다듬었습니다.

특정 게임의 종속적인 룰을 넘어서서, '총을 쏘고 전리품을 얻는다'는 하나의 거대한 장르적 문법으로 데이터를 묶어내기 위함이었죠.

그런데 파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바꾸다 보니, 문득 모니터 화면에 떠 있는 수많은 장르의 이름들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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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ORPG, 방치형, 로그라이크, 루트 슈터, 디펜스... 우리는 왜 이렇게 게임을 잘게 쪼개어 장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걸까요?

그리고 왜 어떤 시대에는 특정 장르가 폭발적으로 유행하고, 어떤 시대에는 역사 속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걸까요?

후배 기획자들과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종종 게임 장르의 발전과 유행이 전적으로 '기술의 발전' 덕분이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과거엔 인터넷 망이 느리고 PC 성능이 떨어져서 턴제 게임을 했고, 네트워크 기술이 좋아지면서 수천 명이 모이는 MMORPG가 탄생했으며,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모바일 게임 장르가 열렸다는 식의 논리죠.

기획자로서 솔직히 말하면... 절반은 맞지만, 이 바카라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절반은 빠져있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기술의 발전만이 장르를 결정하는 유일한 잣대라면 한 가지 모순이 생깁니다.

최고급 그래픽 카드와 언리얼 엔진이 뿜어내는 실사 같은 그래픽을 놔두고, 왜 사람들은 굳이 투박한 픽셀 그래픽의 2D 로그라이크 게임에 열광할까요?

주머니 속의 스마트폰이 과거의 슈퍼컴퓨터보다 빠른 연산 능력을 자랑하는 시대에, 왜 우리는 화면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해야 하는 텍스트 위주의 방치형 게임에 기꺼이 지갑을 여는 것일까요?

그 답은 명확합니다.

장르는 기술이 발전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특정한 경험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탄생하는 것입니다.

기술은 단지 그 욕망을 담아내는 그릇의 크기를 키워주었을 뿐이죠.

지난 4화에 걸쳐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찬찬히 되짚어 볼까요.

2000년대 초중반,

우리는 끝없이 성장하는 경제 호황의 끝자락에 서 있었습니다.

'노력하면 우상향 할 수 있다'는 슬롯적 믿음이 아직 굳건하던 시절이었죠.

그래서 우리는 퇴근 후 3D로 구현된 가상의 마을 광장에 모여, 내가 투자한 땀방울이 정직한 스탯 1로 변환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타인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성취를 과시하던 MMORPG는, 결코 네트워크 기술이 낳은 돌연변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정직한 보상'과 '슬롯적 소속감'을 갈망하던 그 시대 사람들의 뜨거운 욕망이 빚어낸 필연적인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세계를 무너뜨린 것 역시 밖이 아니라 안이었습니다.

정액제라는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섰던 구조가 부분유료화로 넘어가면서, 돈이 시간을 사는 수단이 되어버렸죠.

함께 노력하고 함께 버티던 세계는, 어느새 기울어진 출발선 위의 경쟁으로 조용히 바뀌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MMORPG를 떠난 건 단순히 지쳐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세계가 처음 우리에게 약속했던 '공정한 성장'이라는 믿음, 그 자체가 먼저 깨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대도 함께 변했습니다. 아무리 야근을 하고 허리띠를 졸라매도 집 한 채 살 수 없는 초인플레이션, 하루 종일 회사에서 누군가의 역할을 수행하고 돌아온 3050 온라인 게임인들.

아, 이건 좀 결이 다른 이야기지만, 저 역시 매일 저녁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씻을 힘조차 없이 소파에 파묻히곤 하니까요.

이 지친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건 복잡한 컨트롤이나 수백 시간의 노동이 아니었습니다.

퇴근 후에도 또 다른 역할을 맡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내가 멈춰서 잠든 사이에도 나를 위해 끊임없이 일해주는 시스템을 원했습니다.

'방치형 게임'은 그렇게 아무 역할도 맡지 않아도 되는 하루를 향한 갈망이자, 피로 슬롯의 가장 정확하고도 씁쓸한 그림자로서 우리 삶 깊숙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것이 완벽하게 최적화된 공략집의 시대에 숨 막혀 하던 사람들은 정반대의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기꺼이 모든 것을 잃을 위험(영구적 죽음)을 감수하고서라도 다시 '경험'과 '발견'을 찾고자 불친절한 던전으로 뛰어들었죠.

실패해도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로그라이크'의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오랜만에 정답 없는 우연의 기쁨을 맛보았고, 그동안 조용히 반납했던 판단하는 근육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완벽한 효율의 감옥에서 벗어나 다시 내 힘으로 불확실성에 부딪혀보고 싶다는 역동적인 갈망이 로그라이크의 귀환을 이끌어낸 셈입니다.

결국, 게임 장르라는 것은 하드웨어 스펙이나 프로그래밍 코드가 만들어내는 무미건조한 결과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뚫려 있는 '결핍의 구멍'을 꽉 채우기 위해 부어 넣은 거대한 심리적 주물(鑄物)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채울 수 없는 욕망을 가상의 시스템을 통해 대리 충족하려 합니다.

성장이 막힌 시대에는 손쉬운 성장을 찾고, 고립된 시대에는 느슨한 연결을 찾으며, 억압받는 시대에는 통제할 수 없는 일탈을 꿈꿉니다.

그렇기에 게임이라는 렌즈를 통하면, 지금 우리 슬롯가 무엇에 목말라하고 무엇에 가장 지쳐있는지를 그 어떤 슬롯학 논문보다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제가 19년 동안 숫자를 만지며 깨달은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면, '게임 시스템은 인간 행동과 심리를 이해하는 가장 완벽한 언어'라는 사실입니다.

시즌 1을 마무리하며,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께 조용히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지금 당신의 삶은 어떤 장르의 문법을 따르고 있나요?

끊임없는 퀘스트와 남들과의 레벨 비교 압박에 시달리는 MMORPG의 한가운데 서 계신가요? 아니면 그저 관성처럼 알아서 굴러가길 바라며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은 채 하루를 흘려보내는 방치형의 삶에 머물러 계신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매일 낯선 변수와 부딪히며 깨지고 잃어버리더라도 내일 다시 새로운 맵을 탐험할 준비를 하는 로그라이크의 모험을 즐기고 계신가요?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가 처한 현실이라는 팍팍한 시스템 안에서 발버둥 치는 작은 캐릭터들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발 딛고 선 이 세계가 어떤 장르의 룰로 굴러가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시스템에 끌려다니지 않게 됩니다. 내가 당기고 있는 도파민 루프의 손잡이를 인지하고, 내 뼈아픈 실패가 그저 한 판의 로그라이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내 삶을 내 의지대로 기획할 수 있는 튼튼한 '생각하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게임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욕망해 왔는지, 그 궤적을 쫓아보았습니다.

다음 화부터 시작될 [시즌 2: 사람은 시스템을 만든다]에서는 본격적으로 우리의 심리가 어떻게 일상의 선택을 쥐락펴락하는지 파헤쳐 보려 합니다.

사람은 왜 그토록 숫자에 약한지, 교묘하게 설계된 보상 체계와 밸런스의 함정이 어떻게 우리를 거대한 게임판의 말로 만들고 있는지... 현실 세계의 눈부신 시스템들을 기획자의 서늘한 눈으로 하나하나 해체해 보겠습니다. 커피 한 잔 든든하게 채우시고, 다음 퀘스트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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