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3월 22일, 초량왜관 배향대청
설바카라문 안쪽 배향대청(拜向大廳)의 두꺼운 덧문이 닫히자, 바깥 포구의 소음이 끊겼다.
넓은 대청마루 한가운데 놓인 길쭉한 흑칠 서안(書案)을 사이에 두고, 조일 양국의 대표단이 살얼음판 같이 마주보며 도열했다.
상석 한가운데에는 동래부사 정현덕이 남색 관복을 단정히 여민 채 바위처럼 버티고 앉았다. 그의 오른편에는 왜학훈도 안동준이 벼루와 먹, 묵은 조약 바카라자들을 지키고 앉았고, 그 곁에는 왜학별차(倭學別差) 현석운(玄昔運)이 사역원의 기록 장부를 펼친 채 서릿발 같은 눈으로 왜인들의 입술을 주시하고 있었다. 안동준의 손마디는 미동조차 없었으나, 옥색 도포 위로 눌러쓴 갓끈은 팽팽하게 조여져 있었다.
그 맞은편 자리에 메이지의 사절들이 마주 앉았다.
상투를 잘라내고 흑색 서양식 양복을 빈틈없이 걸친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가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다. 쇠징 박힌 가죽 구둣발을 거칠게 모아 디디며 정현덕과 시선을 정면으로 부딪치는 그의 눈빛은 오만하게 번뜩였다. 그의 오른편에는 신정부의 대수대차사(大修大差使) 정관 히구치 데쓰시로(樋口鐵四郎)가 구색을 맞춘 번(藩)의 정복 차림으로 헛기침을 삼키며 마른침을 넘겼고, 왼편에는 대마번의 막후 바카라사 오시마 도모노조(大島友之允)가 깊은 주름이 패인 얼굴로 조선 관원들의 기색을 기민하게 살피고 있었다. 그들 등 뒤로는 놋쇠 안경을 코끝에 걸친 도쿄에서 건너온 외무성 조사관 사다 하쿠보(佐田白茅)가 먹 묻은 필통을 쥔 채 관찰자의 서늘한 눈으로 붓을 쥐고 있었다.
상석의 조선 관복과 맞은편의 서양 양복, 그리고 쓰시마의 하카마가 한 공간에서 부딪치며 뿜어내는 기류는 숨이 막힐 만큼 적대적이었다. 칼을 찬 일본 경호 무사의 허리춤과 무혁이 쥔 칼자루의 칼날은 정적에도 불구하고 살짝 뽑힌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않는 침묵 속에서, 날 선 시선들만이 흑칠 서안 위를 칼날처럼 교차했다.
그 팽팽한 침묵을 찢은 것은 모리야마였다.
검붉은 비단 보에 싸인 흑단 상자 하나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검은 서안 위로 올라왔다.
모리야마의 손가락이 매듭을 풀어헤치자, 상자 안에서 미끄러져 나온 두루마리 하나가 서안 위로 굴러떨어졌다. 닥종이 끝자락에는 조선 국왕이 하사해 온 250년 된 대마도주의 구리도장(圖書) 대신, 은으로 새로 파낸 사각의 인장(銀印)이 붉은 인주를 머금은 채 차갑게 찍혀 있었다.
"대일본국 황조(皇朝)의 명을 받든 새로운 국서요. 조선 조정에 전하시오."
모리야마의 서늘한 조선말이 회랑의 냉기를 갈랐다.
정현덕이 턱을 움직여 신호를 보내자, 동준의 손가락이 두루마리의 첫 획을 짚었다. 현석운의 붓끝이 마른 종이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리야마 공, 그리고 히구치 정관. 조일 양국이 삼백 년간 피로써 다져온 교린(交隣)의 문턱에서, 지금 이런 불법 사서(私書)를 공문서라 내미는 것이오?"
"불법의 사서라니!"
히구치 데쓰시로가 나직하게 헛기침을 삼키며 눈치를 살폈다. 모리야마가 서안 너머로 상체를 불쑥 들이밀며 하얀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두루마리의 한 구절을 짓눌렀다.
‘我邦皇祚聯綿一系相承總攬太政二千有餘歲……愛我皇上登極更張綱紀親裁萬機’
"여기에 박힌 문자가 보이지 않소! '우리나라(일본)는 황조(皇祚)가 면면히 이어져 한 핏줄로 대를 이어받아 2천여 년간 태정을 총괄해 왔으니…… 이제 우리 황상(皇上)께서 등극하시어 기강을 고치고 넓혀 만기를 친히 재결하신다' 하였소!"
먹물 묻은 붓을 쥐고 회담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던 사다 하쿠보의 메마른 눈빛이 번뜩였다.
모리야마가 거칠게 말을 이었다.
"막부의 정이대장군 따위와는 격이 다른, 만세일계의 천황 폐하께서 친히 조선 국왕에게 내리신 '봉칙(奉勅)'의 서계란 말이오! 서양 열강의 공사들도 만국공법(萬國公法, 국제법)의 예에 따라 이 존엄 앞에 머리를 조아렸소. 조선이 어찌 이 천하의 대세를 거부한단 말인가!"
동준은 모리야마가 손가락으로 짚은 두루마리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메마른 시선이 모리야마의 핏발 선 눈동자를 똑바로 겨누었다.
"모리야마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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