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7월 5일, 동래 초량왜관 설바카라 앞 공터
굵은 소나무 목바카라이 비명을 지르며 쪼개졌다.
동래부가 왜관의 쌀과 땔나무 반입을 전면 차단한 지 두 달째였다.
"문을 열어라! 쌀을 내놓아라!"
목바카라 안쪽에서 터져 나오는 왜인들의 고함은 이미 폭동의 수준이었다. 굶주림에 눈이 뒤집힌 본토 낭인 수십 명이 쇠도끼와 곤봉을 치켜든 채 울타리를 들이받고 있었다. 그들 등 뒤로는 머리를 깎고 검은 양복을 입은 메이지 신정부 관원들이 팔짱을 낀 채 서늘한 눈으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도끼날이 찍힐 때마다 마른 소나무 껍질과 톱밥이 허공으로 튀었다.
설바카라 밖 공터에는 동래부 별군관 박무혁이 이끄는 수문군 이백여 명이 삼열로 빽빽하게 버텨 서 있었다. 서슬 퍼런 장창의 날끝이 목바카라 틈새를 정면으로 겨누었고, 쇠뇌를 잰 군병들의 손가락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물러서라!"
무혁의 호령이 흙바닥을 갈랐다.
두 손에 비스듬히 쥐어 내린 쌍수도 날 위로 차가운 쇳빛이 번뜩였다.
"금표(禁標) 밖으로 단 한 치라도 발을 디디는 놈은 국법에 따라 즉시 목을 베겠다!"
"닥쳐라, 조선 놈들아!"
낭인 하나가 목바카라 틈새로 침을 뱉으며 장도를 반쯤 뽑아 올렸다.
"천황의 칙서를 능멸하고 쌀길을 끊은 건 네놈들이다! 문을 부수고 동래 본청까지 불태워버릴 테다!"
조선의 장창과 왜국의 칼날이 허공에서 맞부딪히기 직전이었다.
양국 군졸들의 숨소리마저 멎어버린 찰나, 옥색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안동준이 회랑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동준은 두 팔을 벌린 채 목바카라과 창끝 사이에 제 몸을 밀어 넣었다.
"수백 년간 약조한 성법(成法)을 깨뜨리고 설바카라을 부수는 자는 제 나라 백성이든 타국의 사람이든 목이 잘리는 단벌(單罰)뿐이오! 그 빗장을 부수는 순간, 그대들이 흘릴 것은 쌀이 아니라 피요!"
그러나 동준의 외침은 낭인들의 굶주린 고함과 쇳소리에 묻혀 맥없이 흩어졌다.
목바카라 안쪽에서 날아온 주먹만 한 돌멩이가 동준의 관모를 후려쳤다. 관모가 땅에 떨어졌다. 낭인들은 쇠도끼로 기둥 밑동을 사납게 찍어 내렸고, 무혁의 수문군들은 일제히 장창을 한 뼘 더 앞으로 내질렀다.
찰칵, 조선 군졸들은 쇠뇌의 시위를 턱밑까지 당겼다.
목바카라을 감싼 동준의 손바닥으로 거친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안쪽에서 통나무로 문짝을 들이받는 둔탁한 충격이 기둥을 타고 뼈마디까지 전해졌다.
문자(文字)로써 지연시키고, 문자로써 발목을 묶어왔던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그 문자의 장벽은 날붙이 앞에서 무력했다.
피로써 국경의 둑이 터지는 순간, 그 모든 파탄의 죄과는 결국 조정의 고관들이 아닌 말단 역관의 목으로 떨어져 내릴 터였다.
우지끈, 마침내 버팀목 하나가 반으로 꺾여 나갔다.
벌어진 목바카라의 틈새 너머로 살기등등한 왜인들이 눈을 부라리며 아우성을 쳤다.
"박 군관!"
동준이 무혁의 어깨를 으스러지도록 움켜쥐었다.
"창날을 거두지 마시오. 허나 저들이 금표를 온전히 넘기 전까진 단 한 놈도 피를 보아선 안 되오. 저들이 파놓은 함정이오."
"훈도 나으리, 지금 무슨……!"
"사태의 몸통은 저 안쪽에 있소."
동준은 바닥에 떨어진 관모를 주워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낭인들이 흔들어대는 설바카라 쪽문으로 몸을 던졌다.
"훈도! 위험합니다!"
등 뒤에서 터져 나오는 무혁의 외침을 뒤로하고, 동준은 거칠게 열려 있는 문틈을 꿰뚫듯 지나 왜관의 영역 안으로 발을 디뎠다.
성난 칼잡이들의 살기 어린 시선이 쏟아져 내렸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흩어진 머리칼을 바닷바람에 흩날리며, 동준은 왜관 깊숙한 곳, 이 모든 파탄을 침묵으로 지휘하고 있을 배향대청을 향해 걸었다.
1870년 7월 18일, 평양 대동문 밖 도축막(屠蹴幕)
거친 가마니를 뜯어내자, 마른 짚단 위로 굵은 자염(煮鹽) 알갱이들이 버석거리며 쏟아졌다.
우물가 멍석 위에는 핏물을 우려낸 쇠가죽 석 장이 팽팽하게 펼쳐진 채 초여름의 볕을 받고 있었다. 무딘 쇠긁개로 가죽 안쪽의 굳은 기름찌꺼기를 밀어내던 학이의 손마디마다 허연 소금버짐이 버석거리며 말라붙어 있었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시큼한 쉰밥을 물에 말아 넘기던 칠복이 문간 쪽으로 숟가락을 멈추며 턱짓을 했다.
사립문 너머로 흙 묻은 짚신 소리가 멎었다.
보부상 둘을 앞세우고 도축막 마당으로 들어선 자는 때 절은 장삼에 삿갓을 눈썹 밑까지 깊게 눌러쓴 승려였다. 대마도의 밀무역선을 타고 황해도 사상(私商)들의 내륙길로 스며든 본토의 망명승이었다.
칠복이 물 만 밥을 씹어 삼키며 퉁명스레 뱉었다.
"동래 쪽 뜬소문이나 주워 들으러 온 게냐."
승려가 삿갓을 젖혀 올렸다. 퀭하게 파인 눈두덩 아래 입술이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뜬소문이 아닙니다…… 고향이 끝장났소."
쉰 목소리가 흙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쇠가죽 위에 소금을 뿌리려던 학이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굳었다.
승려는 칠복의 눈치를 살피며 낮게 가라앉은 왜어(倭語)를 어금니 사이로 뱉었다.
"보신의 난리가 끝났소. 쓰루가성이 함락된 풍문이야 들었겠지만……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었소. 일족이 완전히 도륙 났소.「戊辰の乱は終わった。鶴ヶ城落城の風聞は届いておろうが……城が落ちただけではない。一族ことごとく屠られたのだ。」"
마당을 맴돌던 파리 떼의 날갯짓 소리마저 멎은 듯 적막이 내려앉았다.
"사쓰마와 조슈 놈들이 영국제 대포로 성벽을 밭 갈듯 갈아엎었소. 이이모리산에 올랐던 백호대의 어린것 열여섯은 제 손으로 배를 갈라 죽었소. 계집아이들도 치마를 묶고 나기나타를 들었으나 모조리 짓밟혔소."
학이의 숨이 멎었다. 승려의 갈라진 음성이 이어졌다.
"다음 이야기까지 전할까 망설였소만...... 신정부 놈들이 영지를 몰수하고, 살아남은 가신과 부녀자들을 꽁꽁 묶어 북쪽 끝 눈 덮인 시모키타 반도로 내던졌소. 도남번(斗南藩)이라 이름만 붙여놓았을 뿐, 풀뿌리 하나 나지 않는 갯벌과 화산재 구덩이요. 지난겨울 내내 얼어붙은 진흙을 파먹다 수천 명이 굶어 썩어 문드러졌소.
아이즈의 깃발은…… 이제 천하 어디에도 없소."
학이의 손아귀에서 나무 바가지가 툭, 미끄러져 떨어졌다.
하얀 소금 낟알들이 핏물 고인 진흙 바닥 위로 흩어졌다.
비명도, 눈물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햇볕에 말라붙어 굳어가는 쇠가죽의 붉은 핏빛을, 학이는 그저 메마른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끝에 닿는 거친 쇠가죽의 감촉도, 마당을 찌르는 시큼한 쉰밥 냄새도 일시에 아득해졌다.
성이 불타던 날 피를 토하듯 배를 가르던 아비의 단도.
그리고 피를 쏟으며 숨을 거두던 애월의 마른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전을 맴돌았다.
'무엇이 너를 이 흉흉한 땅에서 버티게 하더냐.'
살아서 돌아가 억울함을 밝히겠다던 맹세의 뿌리가 통째로 뜯겨 나갔다.
돌아갈 고향도, 무릎 꿇을 주군도, 지켜야 할 일족의 어린 목숨도 이제 세상에 없었다.
7년의 세월이 단 한 줌의 재가 되어 흙바닥으로 흩어져 내렸다.
칠복이 숫돌에 대고 있던 칼을 멈췄다.
넋이 나간 듯 흙바닥만 내려다보고 선 학이의 어깨를 묵묵히 건너다보았다.
노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피 묻은 앞치마에 투박한 손을 닦아낼 뿐이었다.
밤이 깊어지자 도축막 마당의 피비린내는 차갑게 굳어갔다.
학이는 단칸방의 벽장 문을 열었다.
궤짝 밑바닥에서 삼베옷을 걷어내고, 기름종이에 싸인 비단 보따리를 꺼냈다. 매듭을 풀자 어둠 속에서 진홍빛 기모노가 펼쳐졌다. 주름진 옷깃 사이로 서늘한 향나무 냄새가 번졌다.
가문이 지워지고 나라가 칼잡이들의 손에 찢겨 나갔을 때, 그녀의 목숨을 건져준 것은 설바카라을 넘기 전 세상에서 알던 것들이 아니었다.
길가 아낙이 무심하게 던져준 흙 묻은 감자 한 덩이.
애월이 제 목숨과 바꿔준 월영각 방 한구석.
옆구리에 대신 칼을 박고 쓰러진 사토 겐지로.
그리고 말없이 길을 비켜주었던 한 조선 무관.
그 모든 온기를 빚진 채, 홀로 비겁하게 산골에 숨어 천명을 마칠 수는 없었다.
지금 바다 끝 초량왜관에서는 서양의 대포를 등에 업은 새 권력자들이 다시금 오만한 칼날을 들이밀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거대한 파국 앞에 홀로 서 있을 한 사내가 있었다.
'먼저 인(仁)을 알고, 칼을 뽑아야 할 때와 거두어야 할 때를 가려라.'
아비의 유지가 귓전을 울렸다.
학이는 품속에서 바래진 종이 한 장을 꺼내 등잔 심지 위로 가져갔다.
불길이 종이 모서리를 물고 들어가며 '溫氣'(온기) 두 글자를 검게 태워 올렸다.
타오르는 불빛이 학이의 메마른 눈동자 속에서 서늘한 결기로 번뜩였다.
칼을 뽑아야 할 때였다.
그녀는 진홍빛 기모노를 단정히 개켜 옆구리에 끼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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