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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 서 (書)

1868년 8월 12일, 한양 운현궁

by밤톨

여름의 운현궁(雲峴宮) 앞은 이른 아침부터 끓어넘치는 솥바닥 같았다.

무더위가 한양 도성의 기와골마다 눅눅하게 내려앉았다.

궐 안팎의 당상관과 삼사의 관료들이 무리를 지어 갓을 맞대고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이는 허공에 주먹을 내지르며 서양 오랑캐의 짓거리들은 인륜을 끊어놓은 천벌 받을 짓이라 성토했고, 어떤 이는 충청도 덕산에서 날아온 비보에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재작년 병인양요의 포연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바다 건너 들어온 독일 상인 놈들이 대원위대감 선친의 유골을 훔치려 했다는 해괴한 소식은 도성 전체를 충격과 비탄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그 웅성거림의 한복판을 안동준은 묵묵히 갈라 들어갔다.

바람 한 점 없는 염천(炎天) 아래, 옥색 도포 자락에는 사흘 밤낮을 달려온 흙먼지와 말라붙은 땀소금이 허옇게 배어 있었다. 가슴팍에 품은 장계 궤는 거친 호흡에 맞춰 위아래로 들썩였다.


노락당(老樂堂) 깊은 처마 아래 들어서자, 서늘한 먹내음과 함께 묵직한 전각의 위압감이 바닥을 짓눌렀다.

대원군 이하응은 평상 위에 반듯이 앉아 있었다. 일전에 보았던 특유의 형형한 눈빛은 여전했으나, 그 벼린 칼날 같던 풍채 위로 선친의 묘소가 훼손당할 뻔했다는 분노와 수치심이 덧씌워져 한층 더 메마른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수염을 쓸어내리는 그의 손가락 끝마디마다 뼈마디가 도드라져 보였다.


동준은 곁에 부복해 서 있는 도승지 신석희(申奭熙)에게 조용히 행장을 풀어 붉은 끈으로 봉한 장계를 건넸다. 도승지가 두 손으로 받들어 평상 위에 올리자, 대원군은 봉인을 뜯어내고 안쪽의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듯 장계를 읽어 내렸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방 안의 공기는 무쇠처럼 무거워졌다.


이윽고 대원군이 장계를 탁자 위에 툭 던졌다.

"……그래서. 왜관 너머 놈들이 곧 쳐들어올 성싶으냐?"

숨결 끝에 밭은 가래가 끓듯 거친 기운이 실려 있었다. 동준이 바닥에 엎드린 채 선명한 어조로 아뢰었다.

"일본 내부의 정세가 지극히 흉흉하여, 당분간은 조선 쪽의 동태를 탐문하며 추이를 살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현재 법국(法國, 프랑스)과 덕국(德國, 독일)의 양이들이 우리 연해 곳곳에 출몰하고 있기에, 그들 역시 함부로 우리 땅을 넘보기보다는…… 이들 나라들의 눈치를 살피며 세를 저울질할 것입니다…… 아울러 예전 장계에 소신이 올렸사옵듯, 일본은 이미 미리견(美利堅, 미국)과 약조를 맺고 그들과 통상을 시작한 지 오래이옵니다."

대원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멈추었다.

"동래 구석에 앉아 있어도, 병인년에 도성 아래서 벌어진 일들은 익히 들었겠지. 강화에서 나라의 보물인 도서와 의궤를 쥐새끼처럼 도적질당한 일이며…… 며칠 전 저 덕국의 부랑패 놈들이 선고(先考)의 산소를 파헤치려 든 그 천인공노할 패륜을 네놈도 알 터이다."

‘선고’라는 말을 뱉는 대원군의 턱관절이 굳어졌다.

"그놈들은 근본도 도리도 모르는 금수(禽獸)의 무리다. 왜놈이라고 다를 것 같으냐? 하물며 왜놈들이 저 양이 놈들과 한통속이 되어 그들의 기술과 처세를 배웠다면, 이 땅에 건너와 할 짓이라곤 도적질과 겁박뿐이지 않겠는가. 전국에 척화(斥和)의 뜻을 단단히 세우고 안으로 군비를 닦는 것만이 사직을 보전할 유일한 상바카라일세."

말을 뱉어낸 대원군은 스스로 감정을 눅여 누르듯, 한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동준은 고개를 조금 더 깊이 숙였다. 하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대감, 소신 역시 대감의 충정과 비통함을 감히 헤아리지 못하는 바는 아니오나, 바깥의 상황이 예전과 같지 않음은 유념하셔야 될 줄로 사료되옵니다. 무엇보다 소신이 맡은 직분에서 살피건대…… 일본 내부에서 조선을 '교린(交隣)의 도'로써 신의를 지켜야 할 벗으로 여기던 막부의 온건한 자들이 이미 몰락해 가고 있습니다. 새로이 실권을 쥔 자들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양이들의 기술과 궤계를 배워 조만간 천하의 중심을 자처하려 들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조선은…… 이제 일본 외에 다른 교린국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방 안이 얼어붙었다. 대원군의 두 눈에서 번뜩이는 안광이 동준의 정수리에 쏟아졌다.

"예를 들면? 대체 누가 있단 말이냐."

"소신 또한 확신할 수는 없사오나, 이리나 승냥이 같지 않은 나라도 저 양이들의 무리 중에 섞여 있지 않을까 사료……."

"닥치거라!"

벽력이 떨어졌다. 대원군이 탁자를 내리치는 둔탁한 소리가 노락당의 서까래를 뒤흔들었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네 눈으로 보고도 그따위 생각을 품는단 말이냐! 내 이미 재작년 법국 놈들에게도 은밀히 손을 내밀어보았고, 서학을 믿는 천주교도들에게도 관용을 베풀 요량이었느니라. 허나 그들이 내민 손에 쥐여준 것이 무엇이었더냐? 황사영 같은 패역한 무리가 흉계를 꾸며 오랑캐의 대포로 조선을 토벌하라는 백서를 바친 것과 무엇이 다르더냐! 내 아비의 무덤을 도굴한게 누구더냐! 도적질과 배신을 먼저 획바카라한 것이 누구겠느냐!"

대원군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동준은 말없이 이마를 차가운 대청마루 바닥에 완전히 붙였다.


바닥의 묵은 송진 냄새와 자신의 가쁜 숨소리만이 귓전을 맴돌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거친 숨을 내리누른 대원군이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너를 왜학훈도(倭學訓導)로 발탁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과거 시험장에서 네가 쓴 답안을 눈여겨보았고, 네가 올린 상소대로 교린의 덕을 널리 펼쳐 변방의 우환을 잠재우려 했던 것도 사실이다. 허나 내게 돌아온 것은 오랑캐들의 침탈뿐이었느니라."


대원군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동준을 내려다보았다.

"너는 이제 내 명을 받들어 국경을 더욱 단단히 걸어 잠그고, 저 왜놈들과 양이들이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아서라. 알겠느냐."

"……성심을 다해 명을 받들겠나이다."


동준의 대답은 담담했으나, 바닥에 닿은 주먹 쥔 손끝은 희게 바래 있었다.

문을 닫아거는 것만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문고리를 가장 앞에서 틀어쥐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었다.




운현궁의 삼엄한 사립문을 빠져나온 동준은 삼청동 골목 깊숙이 발길을 옮겼다.

기와집들이 잇닿은 막다른 골목 끝, 낡은 사립문 안 그늘진 툇마루에 마른 체구의 사내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강위(姜瑋)였다. 청나라 북경의 서바카라 거리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바깥세상의 지형과 문물을 훑어내던 재야의 학자였다. 깊게 파인 미간 아래 자리한 눈빛은 깊고도 날카로웠다.


"대원위대감의 심기가 벼락같았을 텐데, 무탈히 목을 붙이고 나오셨소, 훈도."

강위가 헛기침을 삼키며 툇마루 안쪽의 서재로 동준을 이끌었다. 좁은 방 안에는 북경 바카라쾌들에게서 들여온 궤짝들과 먼지 쌓인 서바카라들이 벽면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강위는 바카라상 위에 놓여 있던 묵직한 서바카라 한 권을 무심하게 집어 동준의 앞에 툭 내려놓았다.

해서체로 정갈하게 박힌 표지 제목이 동준의 시선을 잡아챘다.


『만국공법(萬國公法)』


"양이들의 글을 청나라 총리아문에서 한문으로 번역해 찍어낸 바카라이오."
강위가 불붙지 않은 담뱃대를 만지작거리며 툭 뱉었다.
"함포로 남의 나라 포구를 짓밟던 서양 놈들이, 도적질에 번듯한 명분을 붙이려 짜 맞춘 규율이오."

동준은 조심스럽게 바카라장을 넘겼다. 손끝 아래로 낯선 활자들이 눈에 박혔다.

"……주권(主權). 공법(公法). 권리(權利)…….”

나직하게 읊조리는 동준의 목소리에 메마른 호흡이 실려 있었다.

"조약(條約)이라……."

동준의 손가락이 멈춘 곳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강위가 헛기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수백 년간 금과옥조로 여겨온 천자(天子)와 제후의 위계 따위는 저 바카라 어디에도 없소.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예법도 지워졌지. 저 활자 하나하나가 실은 칼날이오."

강위의 메마른 입술 끝에 서늘한 냉소가 걸렸다.

"이 법에 따르면, 바다 건너 저 양이들은 물론이고 저 왜놈들까지도 저마다 대등한 '자주독립국'이라 부르오. 만국이 서로 대등하여 위아래가 없다는 논리지.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동준이 굳은 낯빛으로 종이를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 속내는 끔찍하리만치 차갑소. 이 공법이란 것은 오직 저들 스스로 '문명'이라 인정하는 패거리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규율이오. 그 울타리에 들지 못하는 나라는…… 그저 이리 떼 앞에 던져진 양고기 신세나 다름없지. 함포로 포구를 열어젖히고, 종이쪽지에 먹물로 서명을 강요한 뒤, 그것을 '만국이 구속되는 법'이라 부르는 거요."


바카라장을 넘기던 동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춘추전국(春秋戰國)과 같구나.’

천자(天子)의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서 제후들이 피를 나누어 마시며 회맹(會盟)하던 춘추전국의 난세. 예의를 앞세우면서도 뒤로는 칼을 헤아리는 아귀다툼의 논리. 허나 기이한 것은 그 너머였다. 천자도, 하늘 아래 유일한 상국(上國)도 없건만, 저들은 대등한 늑대들끼리 맺은 먹물 자국을 감히 '천하 만국의 임금들이 어길 수 없는 율법'이라 부른다고 했다. 도덕도 천명도 사라진 빈자리에, 글자의 얽힘으로 서로의 목줄을 죄어 매는 형국이었다.


"어찌 보시오?"

강위의 물음에, 동준은 바카라을 조용히 덮으며 손바닥으로 표지를 쓸어내렸다.

"차갑고 영악한 법입니다. 도의(道義)는 없고 오직 득실(得失)과 얽어맨 약조(約條)뿐이군요."

동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하지만 어르신, 지금의 제게 이 공법(公法)은 뜬구름같이 먼 나라의 글자일 뿐입니다. 조선에는 이 법을 읽을 줄 아는 신하도, 이 법을 등에 업고 쏠 대포도 없습니다. 우리 홀로 이 법을 꺼내 든들, 이미 서양의 판을 꿰찬 저들이 이를 온전히 따를 리도 없거니와 도리어 저들의 덫에 걸려들까 두렵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왜관의 문바카라(門柵) 너머로 들이닥칠 자들을 마주해야 하는 제게 쥐어진 무기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동준의 손가락이 서안 모서리의 마른 결을 지그시 짚었다.

"기유약조(己酉約條) 이래 수백 년간 한 자 한 획 쌓아 올린 조문(條文)과 전례(前例)입니다. 저들이 양이들의 옷을 흉내 내어 온다 한들, 종이 위에 박힌 문자의 족쇄를 함부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문자로써 지연시키고, 문자로써 그들의 발목을 묶겠습니다. 그것이 왜관에서 제가 치러야 할 전쟁입니다."


강위는 말없이 동준을 응시하다,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독한 싸움이 되겠구려, 안 훈도."




1870년 2월, 동래 초량 왜관


"서른 푼이었어, 김가(金家) 놈아."

화롯가에 쪼그려 앉은 나졸 하나가 벌겋게 튼 손가락 셋을 펴 보였다. 깨진 화로 틈으로 희뿌연 재가 날려 군복 바짓가랑이에 내려앉았다.

"지난달 난전 뒤안에서 골패 짝 엎어지지만 않았어도, 내가 쥔 패가 장끼 꼬리가 아니라 정통 쌍준(雙樽)이었단 말이야. 대마도 놈들이 목바카라 넘어와 주막 술독을 박살 내는 통에 판돈이고 뭐고 짚신 한 짝까지 버리고 튀었지."

"헛소리 마라. 네놈 쥔 패는 썩은 동태포였어. 도리어 그 왜놈들 난출(闌出) 덕에 서른 푼 굳은 줄이나 알아라."

맞은편에 선 포졸이 코를 팽 풀며 침을 뱉었다.

"근데 요새 저 안쪽 꼬락서니가 영 흉흉하긴 해. 개시(開市) 때마다 쌀값 깎아달라 떼쓰는 건 예사고, 설바카라 틈새로 기어 나와 민가 닭장까지 털어먹질 않나. 쓰시마에 양식이 떨어졌는지 관사 안에서 굶주린 이리 떼처럼 서성거리는데, 바다 건너 에도에서 쇼군인지 뭔지가 쫓겨났다는 소문이 영 허튼소리는 아닌 모양이야."


"시끄럽다."

목바카라 그늘 아래서 묵직한 쇳소리가 떨어졌다. 잡담을 나누던 둘의 허리가 즉각 굳었다.

동래부 별군관 박무혁은 설바카라문 기둥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무명천을 칭칭 감아 쥔 환도 자루를 엄지손가락으로 툭 밀어 올리고 있었다. 반 치쯤 드러난 칼날에 허연 빛이 번뜩였다. 그의 시선은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설바카라문 안쪽, 왜관 선착장으로 뻗은 흙길 끝에 박혀 있었다.


자갈길의 메마른 마찰음이 유독 도드라졌다.

나막신을 질질 끄는 하카마 차림의 익숙한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밑창이 단단하고 평평한 무언가가 얼어붙은 땅바닥을 찍어 누르는, 규칙적이고 생경한 박자였다.

또각, 또각. 쪼개는 소리가 목을 죄듯 가까워졌다.


이윽고 소리의 주인이 문바카라(門柵)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냈다.

맨 앞에 선 사내의 형체가 뚜렷해지는 순간, 칼집을 틀어쥔 무혁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솟구쳤다. 곁에 웅크리고 있던 나졸들이 서양 귀신이라도 본 듯 짚신발을 뒤로 물리며 숨을 삼켰다.


상투가 없었다.


늘 보아오던 쓰시마 무사들의 정수리를 민 촌마게 머리도, 넓은 소매의 하카마 자락도 아니었다. 사내는 머리카락을 짧게 깎아 빗어 넘겼고, 몸에는 칠흑처럼 어둡고 빳빳한 서양식 양복(洋服)을 빈틈없이 걸치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조끼 위의 은빛 시계줄, 얼어붙은 자갈을 짓이기는 가죽 구둣발.

대마도주의 심부름꾼이 아니었다. 메이지(明治) 정부의 외무성 관리 직함을 단,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였다.


그때 통사청 쪽 모퉁이를 돌아 안동준이 걸어오고 있었다.

전날 밤새 도지(島知) 측 대통사에게 보낼 접견 규례를 다듬은 서계(書契) 두루마리를 품에 안은채 옥색 도포를 입고 있었다. 평소라면 하수인을 시켰을 터이나, 본국 정변 이후 왜관 안팎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 직접 문면(文面)을 확인하며 건네려던 참이었다.


동준은 우두커니 선 무혁의 곁을 지나며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걸음이 얼어붙었다.

석 자 남짓한 설바카라문 기둥을 사이에 두고, 모리야마의 검은 가죽 구두가 조선과 왜관의 경계를 가르는 흙바닥 위에 멎어 있었다.

상투를 잘라낸 짧은 머리칼. 번듯한 흑색 양복.

삼청동 강위의 서재에서 넘겨보았던 『만국공법』의 차가운 활자들이, 눈앞에서 피와 살을 얻어 서양의 탈을 쓴 채 시퍼렇게 걸어 나온 형국이었다.


모리야마의 시선이 동준의 갓과 도포, 그리고 품에 안긴 서계 두루마리를 느릿하게 훑어내렸다.

그의 입술 끝에 비릿하고 날카로운 조소가 맺혔다.

전직 통사답게 유창하고도 서늘한 조선어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안 훈도, 오랜만이오."


무혁의 손이 본능적으로 칼집을 반 치쯤 밀어 올렸다. 쇳소리가 유독 귀에 거슬렸으나 모리야마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마치 대꾸라도 하듯 챙 넓은 중절모를 벗어들며 서늘한 눈빛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구둣발이 설바카라문 문지방을 짓밟듯 바짝 붙었다.


"도쿠가와의 막부도, 쓰시마의 왜관도 끝났소. 나는 이제 메이지(明治) 조정의 명을 받들어 이 자리에 섰소."

모리야마의 시선이 동준의 가슴팍에 안긴 서계 두루마리로 떨어졌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실소가 번졌다.

"그 품에 든 낡은 약조(約條)는 도로 집어넣으시오. 조선이 쓰시마에 내려주던 옛 도서(圖書)는 이제 쓰지 않소."


모리야마가 품 안에서 흑단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비단 보에 싸인 모서리가 차갑게 번뜩였다.

"대일본국 황조(皇朝)의 명을 받든 새로운 국서요. 조선 조정에 전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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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사진: 운현궁, 노안당.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2804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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