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3월 9일 자정, 충청도 보령 포구
어두운 기와 담장 위로 검은 손가락들이 소리 없이 걸렸다.
가죽 끈으로 소매를 동여맨 사내들이 턱을 치켜들며 몸을 솟구쳤다. 작은 산짐승이 나무를 오르듯, 기와골의 굴곡을 움켜쥔 팔근육이 팽팽하게 걸렸다가 당겨졌다. 열 남짓의 그림자가 담장마루에 배를 바짝 붙인 채 안채 뒤뜰의 동정을 살폈다.
발목을 꺾어 기와 턱을 디딘 뒤, 무게를 죽인 몸뚱이들이 차례로 허공을 갈랐다. 나막신 대신 짚풀에 무명천을 덧댄 발바닥이 마른 잔디 위로 미끄러지듯 내려앉았다. 흙 알갱이 하나 튀지 않았다.
이나가키 시노루는 기와 담 밑에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춤의 칼집을 비껴 쥐었다. 숫돌에 벼린 날 끝이 칼집 입구의 놋쇠 테두리를 긁으며 칼날 반 치가 서늘하게 밀려 나왔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시노루가 손가락 셋을 펼쳤다 접었다. 사내들은 말 한마디 없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셋은 취객들의 웃음소리가 잦아든 사랑채 봉당 밑으로 그림자처럼 기어들었고, 다른 셋은 등롱 불빛이 희미한 중앙 복도의 디딤돌을 짚었다. 시노루와 낭인 둘은 쪽방과 안채로 곧장 이어지는 별관 복도의 툇마루 그늘을 파고들었다.
사위는 쥐 죽은 듯 적막했다. 구름 사이를 빠져나온 서늘한 달빛이 처마 끝을 스칠 때마다, 덧문 틈새로 비껴 든 칼날의 서슬이 푸르스름한 은빛 궤적으로 번뜩였다 사라졌다. 기둥 그림자 속으로 스며드는 짚신의 바스락거림조차 마른 갯바람에 지워졌다. 포위망이 안채의 숨통을 향해 거미줄처럼 죄어들고 있었다.
같은 시각, 안채 깊숙한 골방의 공기는 타들어 가고 있었다.
애월은 분 냄새 나는 겉저고리를 벗어던지고 좁은 소매의 무명 옷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소리 내지 마라. 치맛자락을 말아 쥐고 문간 행랑 아범을 따라 담장 밑 개구멍으로 나가."
애월은 공포에 질려 입술이 파랗게 질린 어린 기녀 셋의 등을 떠밀어 어두운 뒤란 쪽으로 내보냈다. 마당 건너편에서 인기척이 지워지는 찰나의 틈을 타 식솔들을 하나둘 밖으로 빼돌리는 중이었다.
마지막 남은 손이 학이의 손목을 낚아챘다.
학이는 남색 장옷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였다. 여인의 손가락 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나, 애월의 손을 맞잡아 쥔 힘줄엔 팽팽한 긴장이 실려 있었다.
"숨소리도 내지 마라. 사랑채 놈들이 마당을 훑는 동안, 우린 별관 뒤꼍 샛길로 빠져나가야 해."
애월은 한 손으로는 학이의 손목을 단단히 얽어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묵직한 마름모꼴 놋장죽을 꼬나쥐었다. 두 사람은 신도 신지 않은 채 하얀 버선발로 복도 모퉁이를 돌았다. 나무 판자가 체중에 눌려 미세한 삐걱거림을 낼 때마다 애월의 목덜미로 식은땀이 흘렀다.
열 보만 더 가면 뒤란 헛간으로 이어지는 협문(夾門)이었다.
그 찰나였다.
별관 복도가 꺾이는 모퉁이의 짙은 어둠 속에서 성큼, 시커먼 형체 둘이 목을 조르듯 길을 막아섰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지척이었다. 구름을 벗어난 희미한 달빛이 낭인의 눈자위를 비추는 순간, 사내의 손이 허리춤의 칼자루를 틀어쥐었다. 코등이가 칼집 테두리를 때리는 마른 쇳소리와 함께 시퍼런 칼날이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여인의 장옷 깃 너머로 드러난 학이의 파리한 얼굴, 그리고 아이즈 백색 목랍의 차가운 잔향이 복도를 채웠다.
앞선 사내의 눈에 번뜩이는 살기가 튀었다.
물러설 퇴로는 없었다. 맞닥뜨린 거리는 칼끝보다 짧았다.
애월의 눈썹이 서슬 퍼렇게 솟구쳤다. 여인은 학이를 제 등 뒤로 밀쳐냈다. 쥐고 있던 굵은 놋장죽을 번쩍 치켜들며 막아섰다. 뺨 위로 파리한 핏줄이 섰다. 목소리는 떨렸으나 당당했다.
"어디서 굴러먹던 부랑패 놈들이 안채까지 발을 들여!"
애월의 장죽 끝이 문지방을 넘던 낭인의 관자놀이를 내리찍었다. 뼈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고개가 비스듬히 꺾였다. 그러나 낭인은 비틀거리면서도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희번득이는 칼날을 과시하듯 천천히 꺼내보였다.
먹이를 낚아채는 매서운 새 한 마리처럼, 서늘한 은빛 한 줄기가 애월의 옆구리를 스치며 날아 내렸다. 기녀들이 품에 숨겨 지니던 은장도. 학이의 손을 떠난 단도가 허공을 회전하며 앞선 낭인의 오른쪽 허벅지 안쪽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낭인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지금…… 뛰어, 언니!
벙어리 학이의 굳어 있던 목구멍에서 찢어지듯 쉰 고함이 터져 나왔다. 서툴고 거친 이국의 억양이 섞인 조선말이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