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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 서 (書)

1868년 2월 14일, 동래부

by밤톨

벼루 바닥을 긁어내리는 먹칼 소리가 규칙적으로 서고를 울렸다.

안동준은 묵은 바카라의 닳아빠진 모서리를 엄지로 훑으며 먹을 갈았다. 쇄환 공문 따위는 이제 서안(書案) 어디에도 없었다. 때 절은 서바카라들이 제멋대로 포개진 채 바카라상 모서리에 위태롭게 걸쳐 있었다. 수백 년 묵은 조례(條例)들을 닥치는 대로 뒤적이느라 손끝마다 거뭇한 먹때가 박여 있었다.

관모 아래로 드러난 턱선은 까칠하게 돋아난 수염으로 덮였고, 뺨은 잿빛으로 말라 있었다. 밤을 새워 붉어진 눈동자가 종이 위 먹선 하나하나를 건조하게 긁어내렸다. 땀과 묵은 때로 깃이 빳빳하게 절어붙은 소맷자락 끝은 바카라장을 넘기느라 마찰에 닳아 올이 허옇게 터져 나갔다.

오직 장부의 오자(誤字) 하나와 누락된 관인 하나만을 집요하게 솎아내는 데 온 신경이 박혀 있었다.


"나으리, 대마도의 통사가 당도했습니다."

문밖에서 만석이 인기척을 냈다.

"들라 하라."

동준은 붓을 쥔 채 고개도 들지 않았다.

장지문이 열리며 들어선 대마도의 통사는 짚신도 제대로 벗지 못한 차림이었다. 사내의 품에서 나온 것은 기름때 묻은 얇은 미농지(美濃紙) 두루마리였다. 관수왜(館守倭)의 직인이 찍힌 정식 서계가 아니었다.

"정식 교역 장부가 아니지 않은가."

동준이 건조하게 물었다.

"본토가…… 뒤집혔습니다."

사내의 메마른 입술이 잘게 떨렸다.

"지난달 말 도바와 후시미에서 막부군이 사쓰마·조슈 군대에 대패했습니다. 요시노부 공께서는 군함을 타고 에도로 도망쳤고, 교토의 조정은 도쿠가와 가문을 '조정의 적(朝敵)'으로 선포하여 토벌령을 내렸습니다."

동준의 붓끝이 종이 위 허공에서 멎었다.
먹물 한 방울이 닥종이 위로 툭 떨어져 번졌다.


그는 서안 위에 던져진 얇은 종이를 끌어당겼다.
관청의 필체 대신 황급히 갈겨쓴 거친 먹선 사이로 몇 개의 단어가 박혀 있었다.


天皇親政. 錦旗下賜. 幕府崩壞.
천황친정. 금기하사. 막부붕괴.
천황이 직접 정사를 쥐고, 토벌의 비단 깃발이 내려졌으며, 막부는 무너졌다.


이백육십 년 동안 조선 국왕과 대등하게 마주 서던 에도의 쇼군이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전락했다. 열도의 우두머리가 '천황'의 이름으로 모든 권력을 거머쥐었다는 것은, 곧 조선을 향해 새로운 하늘을 인정하라 윽박지를 날이 머지않았음을 뜻했다.

대마도주의 관인 너머에 숨어 있던 자칭 황제가 마침내 껍질을 깨고 국경선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청나라의 황제와 획 하나 달리 쓰지 않는 그 ‘황제’.


"모리야마는 어디 있는가."

동준이 미농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통사가 시선을 떨구었다.

"금문의 변 이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조슈의 카츠라 코고로 밑으로 들어가 신정부의 총독부 직함을 얻었다 합니다."

"결국 줄을 갈아탔군."

동준은 바스락거리는 미농지를 접어 소매 안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붓을 서안 모서리에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초량에서 동래부 동헌까지는 말을 몰아 삼십 리 길이었다.

동준은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지 않았다. 마른 뺨에 바닷모래가 서걱거리며 달라붙었으나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밤샘으로 핏발 선 눈동자는 길가에 흩어진 징후들을 기계적으로 훑어 내렸다.


초량 포구의 왜선들은 닻을 내린 채 짐을 풀지 않고 있었다. 선창 바위에 걸터앉은 대마도 상인들은 담뱃대만 잘게 빨아댔고, 지게에 실린 것은 쌀가마니가 아니라 말린 미역과 땔나무 따위의 잡물뿐이었다. 본토의 곡물 공급이 끊기자 대마도가 비축미 반출을 틀어막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삼거리 늙은 버드나무 기둥에 붙은 척화 방(榜)은 비바람에 젖어 먹물이 번져 있었다.

'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즉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가만히 속으로 읽었다. 글씨는 굵고 서슬이 퍼랬으나, 찢겨 나간 종이 귀퉁이 밑에서 장사치들은 닷 푼짜리 짚신 값을 놓고 멱살잡이를 벌이고 있었다.

국경 너머에서 권력의 칼자루가 통째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길 위 어디에도 없었다.

말발굽이 자갈을 짓이길 때마다, 품속의 미농지가 뼈마디를 누르며 바스락거렸다.


동래읍성 남문을 지나 동헌 삼문(三門)으로 들어섰다.

삼지창을 든 군졸 둘이 흙먼지투성이인 동준의 관복 자락을 훑었다. 변방 역관을 대하는 무신경한 눈길이었으나, 동준은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삐걱거리는 낡은 마루를 밟고 동헌으로 올라섰다.

부사 정현덕의 서안(書案) 위에 미농지가 내려앉았다.


정현덕은 종이를 눈으로 대충 훑더니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밀어냈다.
"바다 건너 오랑캐들이 권력을 놓고 칼부림을 벌이는 게 하루이틀인가. 에도의 쇼군이 쫓겨났든 제들끼리 성을 불태웠든, 쌀과 베를 얻어가려면 예전처럼 대마도주를 시켜 동래부 본청에 머리를 조아려야 하네. 이백 년 법례가 그리 만만한 줄 아는가."

"영감, 칼을 쥔 자들이 바뀌었습니다."

동준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이번에 권력을 잡은 자들은 서양 함포의 맛을 본 자들입니다. 게다가 저들이 내건 깃발은 쇼군이 아니라 천황입니다."

"천황?"
턱수염을 쓸어내리던 정현덕의 손마디가 굳었다.
"천하에 황제는 오직 북경의 황상 한 분뿐이거늘, 섬나라 놈들이 황제를 참칭한단 말인가?"

"그렇기에 위험합니다. 저들은 이제 대마도라는 작은 섬을 거치는 교역을 끝내려 할 것입니다. 조일의 낡은 약조를 찢어발기고, 스스로를 황제국이라 칭하며 대등이 아닌 상국(上國)의 위치에서 조선의 문을 두들길 것입니다."


잠시 미농지를 내려다보던 부사가 장부를 펼치며 낮게 잘라 말했다.
"우리 조정의 척화 기강이 서슬 퍼런 때일세. 왜놈들이 참람한 문서를 들이민다면 그 자리에서 찢어 불태우고 대마도의 쌀길을 끊어버리면 그만이야...... 그렇지 않나?"

정현덕은 붓을 들어 먹을 찍었다. 더는 말을 섞지 않겠다는 듯, 장부의 한곳만 묵묵히 노려보았다.


동준은 부사의 굳게 닫힌 입술을 내려다보았다.

곧 허리를 꺾어 절을 올린 뒤 말없이 동헌 마루를 내려왔다.




설바카라문 앞 수문청 벽체(壁體)에 박무혁이 기대어 서 있었다.

무혁은 흙바닥에 침을 뱉고, 흙 묻은 짚신발로 거칠게 비벼 덮었다.

"왜학훈도 나으리."

무혁이 턱 끝으로 왜관 안쪽의 선창을 가리켰다.

"포구 놈들 꼴이 이상하오. 며칠 전부터 들어온 왜선들이 짐도 안 풀고 관수왜 처소로 우르르 몰려가고 있소. 또 난출이라도 꾸미는지 걱정이오."

동준은 품속에서 바스락거리는 미농지 두루마리를 쥐었다 놓았다.

"난출이 아니네."

"그럼?......"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졌네. 열도 전체가 뒤집혔어."

무혁의 거친 손마디가 반사적으로 칼자루를 그러쥐었다.

"그렇다면...... 저 본토 놈들이 떼거리로 몰려와서 임진년같이 우릴 들이친다는 거요?"

"칼을 들고 넘어오는 게 아닐세. 조만간 공문서 한 장을 들고 올 테지……"

동준이 목바카라의 소나무 기둥에 손바닥을 얹었다. 비바람에 거칠게 일어난 옹이가 살갗을 파고들어 따가웠다.

"언제든 불질러 태워버릴 수 있도록 박아둔 나무 울타리로 이백 년을 버텼네. 혹여 왜국이 변심하여 쳐들어와 요새로 쓰지 못하도록......"

동준의 손가락 끝이 껍질의 마른 결을 긁어내렸다.

"허나 그 울타리를 불지르는 건 이제 저들이 원하는 바일지 모르네."

무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깨에 멘 칼집을 비껴 잡은 무혁이 몸을 돌려 수문청 처마 밑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삐걱,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걸렸던 목바카라의 빗장이 열리고, 동준은 설바카라을 넘었다.

왜관 안쪽으로 들어서자 조선의 흙먼지 냄새는 잦아들고, 젖은 짚과 삼나무 타는 매캐한 연기가 낮게 깔렸다. 길 양옆으로 왜인들의 가옥 처마가 잇닿아 있었으나,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굳어 있었고 누구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동준은 선창 쪽 골목을 비껴 용두산 자락으로 난 완만한 돌계단을 밟았다.

동향사(東向寺).

조선과 대마도 사이를 오가는 문서의 문구를 대조하고 망자의 혼을 달래던 승려들이 머무는 사찰이었다. 전각 앞마당에는 굵은 백사가 깔려 있었고, 대나무 빗자루로 쓸어낸 자국이 정갈하게 물결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바다 쪽으로 트인 툇마루 끝, 낡은 먹빛 가사를 걸친 가쿠잔(覺山)이 미동도 없이 정좌해 있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풍경 소리가 짤랑, 하고 마른 쇳소리를 냈다.


동준이 툇마루 아래 댓돌에 섰다. 신발 끄는 소리에 가쿠잔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깎아놓은 승려의 두상 너머로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안 통사 「安通事。」"

가쿠잔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에 섞여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소「ずいぶんと面やつれされましたな。」"

동준은 툇마루 모서리에 걸터앉지 않은 채, 관모를 매만졌다.

"통사로서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을 쳐낼 뿐입니다「通事として、日々の勤めをただこなしているまでにございます。」"

"그 일이라는 것이 사람의 피를 말리는 법이지."

가쿠잔은 다시 시선을 돌려 먼바다를 응시했다. 부산포 앞바다의 물결은 잿빛으로 출렁이고 있었고, 수평선 끄트머리에 점점이 박힌 섬들은 안개에 젖어 희미했다.

"바다를 보며 무얼 빌고 계셨습니까."

동준의 물음은 건조했다. 가쿠잔이 손가락에 걸린 염주 알을 하나 굴렸다. 나무 알이 맞부딪치는 딱, 하는 소리가 났다.

"사토 군과…… 치즈루 양을 생각하고 있었소."

동준의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서늘한 바닷바람만 스쳐 지나갔다.

가쿠잔이 낮게 덧붙였다.

"늘 자네에게 큰 빚을 진 기분이라오. 살아남은 자가 짊어지기엔 너무 무거운 짐을 그대 혼자 지고 있는 것 같아서."

"……소식이 있습니까."

동준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묻어나는 질문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가쿠잔은 염주를 쥔 손을 무릎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어딘가에서 숨을 쉬며 잘 지내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소. 어디서 무얼 하는지는…… 내게도 끝내 말해주지 않더군. 그 아이답지."

동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매년 동지가 지나고 첫 배가 닿을 무렵이면, 사찰을 오가는 승려들의 입을 통해 '안부를 묻지 않아도 잘 살아 있다'는 서너 마디 말이 바다를 건너와 그의 귀에 닿곤 했다. 그리고 동준이 여전히 관포를 입고 설바카라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 역시, 같은 바람을 타고 그 아이에게 닿았을 터였다.

어디에 있는지 알 필요도, 무엇을 하는지 캐물을 까닭도 없었다.


"그 아이는…… 그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듯하오."


가쿠잔의 음성이 파도 소리 사이로 나직하게 흩어졌다.

"서로의 안녕을 위해. 그 침묵이 서로를 지키는 가장 질긴 방바카라이라는 걸 아는 게지요."


동준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는 가쿠잔의 곁에 나란히 서서 잿빛으로 일렁이는 수평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람이 거세지며 처마 끝의 풍경이 다시 한번 파열하듯 울었다.

저 바다 너머에서 새로운 칼을 쥔 자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말없이 지켜보고 선 국경의 바다는 차갑고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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