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 로 (路)

1865년 3월 8일, 충청도 보령 월영각

by밤톨

월영각 담장 너머로 모처럼 포근한 남풍이 불어 들고 있었다.

기나긴 겨울의 삭풍이 물러간 자리, 뜨락 양지바른 돌담 밑으로 붉은 매화와 살구꽃 망울이 하나둘 붉은 숨을 터뜨리고 있었다.

마당 한편 널찍한 마루 끝에는 애월이 홀로 앉아 무릎 위에 거문고를 얹어두고 있었다. 술 취한 난봉꾼들을 쫓아내던 서슬 퍼런 기생 행수의 얼굴은 없었다. 기름 먹인 명주실을 퉁기는 그녀의 손끝을 따라 낮고 그윽한 현의 울림이 봄볕 속으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뜰 안채 뒤편에서는 장작 타는 구수한 냄새와 함께 하얀 연기가 흩날렸다.


치즈루—이제는 기방의 벙어리 동생이 된 학이였다. 소매를 걷어붙인 학이는 솥에 불을 지펴 기녀들의 찻물을 달이고, 맑은 우물물에 헹궈낸 무명 옷가지들을 널판에 널어 볕을 쬐이고 있었다. 지난 며칠 등잔불 밑에서 애월에게 '기역, 니은' 획을 배우고, 낯선 조선말의 귀를 틔워가며 얻어낸 분에 넘치는 평온이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거문고 소리가 마음에 차분한 온기를 얹어주었다.


찻상을 내어 안채 마루로 올리고, 기녀들의 잔심부름을 마칠 무렵 뉘엿뉘엿 해가 기울었다.

등롱에 불을 밝히기 전, 안채 모퉁이 쪽방 안은 푸르스름한 어스름에 잠겨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학이는 무릎을 꿇고 앉아 경대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손때 묻은 얼레빗과 마른 수건을 가지런히 놓던 손끝이 참빗 곁에 묵직하게 놓인 낯선 물건에 닿았다.


하얀 백자 통이었다.


낮에 애월이 얹어두고 간 기름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학이는 조심스럽게 뚜껑을 돌려 열었다.

그 순간, 틈새에 갇혀 있던 서늘하고 단단한 향이 훅 끼쳐왔다.

짙은 흙내와 은은한 유황, 그리고 불에 그을린 옻나무 열매 특유의 메마른 잔향.


학이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멎었다.

숨이 목구멍 안쪽에서 굳어버렸다. 이역만리 조선 땅의 갯바람과 볏짚 먼지 속에서는 결코 피어날 수 없는 냄새. 교토의 공경(公卿)들과 에도 상급 무가의 여인들이 올린머리를 결 곱게 빗어 넘길 때에나 은밀히 쓰던, 서늘하고 단아한 오슈(奥州) 명품의 숨결이었다.


'아이즈(会津)의 백색 목랍.'


머릿속에서 차가운 쇠사슬이 덜컥 맞물렸다.

우연일 리 없었다. 머나먼 호서 포구의 기방 안채에 이 물건이 제 발로 굴러들어왔을 리는 만무했다. 그렇다면……


'시노루……'


놈이다. 놈이 보령에 당도했다. 아비의 등 뒤에서 머리를 벤 처형 집행자. 냄새를 미끼 삼아 기어코 이 기방 담장 밑까지 칼끝을 들이밀고 있었다.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며 백자 뚜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요 위를 구르는 뚜껑을 주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학이, 아니 치즈루의 등줄기를 타고 얼음물 같은 한기가 곤두박질쳤다.


스르륵, 미닫이문이 열렸다.

"학이야, 저녁 술상 차림을……."

거문고를 거두고 방으로 들어서려던 애월의 시선이 바닥에 뒹구는 백자 뚜껑에 멎었다. 그리고 사시나무 떨듯 어깨를 떨며 핏기 하나 없이 질려버린 학이의 얼굴을 훑었다.

애월의 미간이 서늘하게 좁아졌다.
이유를 물을 필요조차 없었다. 지난 낮에 장바닥에서 보상이 떠벌리던 지나치게 유려한 입담과, 방바닥에 뒹구는 백자 통, 그리고 숨조차 쉬지 못하는 학이의 공포.

포구의 온갖 권세가와 밀수꾼들을 저울질하며 잔뼈가 굵은 기방 행수의 촉이 이 고리를 놓칠 리 없었다.

사내들이 그물을 던졌고, 자신은 그 미끼를 덥석 물어 안채 깊숙이 날라다 준 꼴이었다. 애월의 등 뒤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애월은 지체 없이 문을 닫아걸고 학이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방에 불을 켜지 마라. 문틈으로 그림자도 비추지 말고 구석에 웅크려 있어."

애월은 곧장 치맛자락을 걷어붙인 채 기방 뒤편 행랑채로 내달렸다.

"문갑 뒤편 쇠패를 가져와라. 당장 포구 샛길의 마(馬) 서방을 기방 뒤편 헛간으로 불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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