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3월 12일, 충청도 보령 월영각
사기 술병이 놋쟁반을 치며 쨍한 파열음을 냈다.
"애월이, 수영(水營)의 우후(虞候) 영감께서 이번 진상품 감찰만 무사히 넘기시면 곧장 통제영 통어사 자리로 영전하실 몸이다. 그런 큰 어른의 오른팔인 내가 친히 발걸음을 했거늘, 술잔만 채우고 입을 다물고 있어?"
수영의 군기(軍器) 장부를 쥐고 흔든다는 감결관(甘結官) 배 참봉이 비스듬히 몸을 일으키며 애월의 새하얀 손목을 거칠게 낚아채려 들었다.
번들거리는 손끝이 닿기 직전, 마른 대나무 담뱃대의 놋쇠 끝머리가 사내의 엄지손가락 마디를 정확히 내리눌렀다. 윽, 소리와 함께 사내의 손이 상 모서리로 떨어졌다. 축 늘어진 그의 턱살이 더욱 일그러졌다.
"배 나으리, 한양에서 암행어사가 내려온다는 흉흉한 소문이 장바닥에 파다합니다. 수영의 군량미를 몰래 빼돌려 주머니를 채운 비리를 캐러 온다고요. 우후 영감의 영전길에 꽃을 뿌리지는 못할망정, 기방 봉당에서 손버릇이나 거칠게 놀리다 어사또 사령 놈들 장부에 이름 석 자 올리시렵니까?"
배 참봉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이년이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구나! 일개 포구 기생년 주제에 어디서 나랏일을 입에 올려? 그래, 그리 정승 판서 뺨치게 똑똑하면 오늘 밤 내 처소에 들어 수영의 회계 장부라도 뜯어 보지 그래? 비리가 있는지 없는지, 함께 밤을 새면서 말야."
좌중에 섞여 있던 수영 장교 둘이 키득거리며 추임새를 넣었다. 기방의 공기가 순식간에 험악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애월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빈 잔에 맑은 청주를 찰랑거리도록 채웠다.
"나으리께서 기어이 제 붓을 빌려 장부를 맞추시겠다면, 관아 앞마당에 멍석 깔고 감영(監營)의 영리(營吏)들을 배석시킨 뒤 삼자대면으로 짚어드리지요. 그게 아니라면…… 이 잔은 갯바람 맞으며 바다를 지키는 군졸들의 노고를 생각해 곱게 비우십시오.”
애월이 잔을 사내의 코앞으로 가볍게 밀어 넣었다. 술 표면에 등잔 심지가 파르르 비쳤다.
"술은 향을 알고 사람의 도리를 가늠하고자 드는 것. 무관의 칼을 쥔 손으로 술상머리에서 여인 옷섬이나 찾아 헤매는 건 보령 갯가의 부랑배들도 부끄러워 피하는 작태 아니겠습니까."
말끝은 부드러웠으나 어조는 바늘처럼 날이 서 있었다. 배 참봉은 허공에 뜬 손을 거두지 못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계집의 말마디 뒤편에 포구의 온갖 권세가들과 닿아 있는 거친 그물이 똬리를 틀고 있음을 사내 역시 모르지 않았다.
사내는 헛기침을 두어 번 뱉어내고는 내민 잔을 단숨에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흥, 도도한 척은 혼자 다 하는군. 가자, 술맛 떨어졌다."
거친 발소리와 함께 주정뱅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장지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식어가는 기름 냄새와 매캐한 담배 연기만 남았다. 애월은 흐트러진 옷깃을 단정히 여미고 장죽에 묻은 분가루를 털어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묵직한 피로가 목덜미를 타고 내렸다.
등 뒤에서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기척을 죽인 발걸음으로 다가와 소반 위에 따스한 국화차 사발을 내려놓는 손길이 있었다.
학이였다. 정갈하게 매만진 댕기 머리, 무명치마 밑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몸가짐. 온화하고 차분한 결이 여인의 손끝마다 배어 있었다.
찻잔을 쥔 애월의 손끝이 식어가는 도자기 표면을 느릿하게 쓸었다. 고개를 숙인 학이의 시선과 애월의 시선이 교차했다. 학이의 시선은 애월의 굳게 다문 입술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고, 애월은 학이의 기색을 서늘하게 살폈다.
며칠간 눈여겨본 학이의 거동이 애월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마당에서 식솔들이 악을 쓰며 웃고 떠들 때도, 사내들이 거친 사투리로 고함을 지를 때도 학이는 함께 웃거나 소리에 놀라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다만 누군가 말을 건네올 때마다 상대의 입 모양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어깨의 들썩임이나 손짓의 방향을 더듬어 간신히 눈치를 맞출 뿐이었다.
말을 잃은 벙어리라기엔, 말귀 자체를 새겨듣지 못하는 자의 기색이었다.
애월이 짐짓 무심한 투로 입술을 뗐다.
"학이야, 부엌 아궁이 솥뚜껑을 덮어두고 왔느냐?"
학이가 흠칫하며 애월의 입술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잠시 후 엉뚱하게도 탁자 모서리에 놓인 다기 뚜껑을 집어 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리를 알아듣고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뚜껑'이라는 단어와 애월의 손짓을 대충 엮어 눈치로 때려 맞춘 몸짓이었다.
자정이 지나 이경(二更)을 훌쩍 넘긴 시각, 안채 모퉁이의 작은 쪽방은 쥐 죽은 듯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조용히 미닫이문을 연 애월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화로 곁에 모로 누운 학이의 곁으로 다가가, 추위를 타듯 웅크린 어깨 위로 이부자리를 끌어올려 주었다. 손끝이 바닥에 깔린 얇은 요 모서리에 닿았을 때, 요 밑에 묵직하게 받쳐진 둔탁한 감촉이 손바닥을 스쳤다.
애월은 망설임 없이 손을 찔러 넣었다.
끌어낸 것은 손때 묻은 한문 서바카라 두 권과, 그 사이에 끼워둔 기름종이 뭉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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