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11월 1일, 배내골
동래읍성에서 운문사로 이어지는 산길은 깊고 가팔랐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 가시덤불을 헤치며 걸음을 재촉했으나, 날이 저물 때까지 짐승들만 울부짖는 깊은 산속을 헤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월을 지나 십일월로 접어든 밤바람은 살갗을 베어낼 듯 매섭고 차갑게 파고들었다. 결국 두 사람은 해가 능선을 넘어가기 전, 서둘러 산비탈 아래 작고 고요한 고을로 몸을 피했다.
초가집 처마마다 저녁 짓는 연기가 가느다랗게 피어오르는,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작고 고요한 마을이었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마을을 완전히 덮을 무렵, 두 사람은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허름한 주막 안으로 스며들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고도 치즈루는 쉬이 남색 장옷을 벗지 못했다. 그녀는 장옷 깃을 단정하게 여민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관복을 입은 통사 나으리께서 저 같은 근본 모를 이방의 아녀자를 데리고 돌아다니시다, 행여 사람들의 입방아에라도 오르내리면 어쩌시려고 이러십니까."
걱정이 잔뜩 묻어나는 음성에 동준은 엷은 실소를 머금으며 탁자 위에 짐을 내려놓았다.
"내가 뭐 문과에 장원급제라도 하여 동래부 본청에 거드름 피우며 내려온 줄 아시오. 나는 그저 서자 출신에, 이름도 없는 역과 합격자일 뿐이오. 남의 이목을 끌 만큼 대단하고 중요한 인물이 아니란 말이오."
동준의 자조 섞인 말에 치즈루가 반달 같은 눈을 살짝 들어 동준을 똑바로 응시했다.
"어째서 스스로를 그토록 깎아내리십니까. 《논어》에 이르기를, 군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근심하지,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않는다(君子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 하였습니다."
동준은 가만히 치즈루를 바라보았다.
"멸문지화를 당한 왜국의 여인이, 조선 땅에서 출세가 반쯤은 가로막힌 서자에게 던지는 위로라. 참으로 묘한 일이나... 의외로 제법 의지가 되는구려."
곧이어 주모가 가져온 낡은 소반 위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국밥 두 그릇과 막걸리 한 사발이 내어졌다. 쌀쌀한 늦가을 저녁, 얼어붙은 몸을 덥히는 뜨거운 국물과 탁주 한 잔만큼 산골 주막의 운치에 어울리는 것은 없었다.
언 손을 녹이며 숟가락을 들던 치즈루가, 불쑥 동준을 향해 나직하게 물었다.
"나으리께선, 어찌하여 첫날 저를 거두어 주셨습니까?"
"글쎄. 정확한 연유를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낭자를 본 그 즉시 내 관아에 고발할 수는 없었네."
"정말, 그것뿐이십니까."
동준은 국밥을 뜨려던 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날 밤새 나는 생각했지. 이것이 동준으로서 내린 결정인지, 아니면 조선의 역관으로서 내린 결정인지."
"...둘 중 하나에, 망설임은 있으셨습니까?"
"아니. 결국 둘 다 같은 결정을 내리더군."
치즈루의 눈동자가 순간 잘게 흔들렸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녀의 음성이 가늘게 떨려 나왔다.
"저를 구해주시는 것이 나으리께 대체 어떤 도움이 된단 말입니까?"
"아무리 따져 보아도, 내게 득이 될 것은 아직 찾지 못했네."
"그럼 어찌하여 나으리는 여태껏 제게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으십니까. 이 위태로운 상황을 빌미로 저를 하대하지도 않으시고, 모진 일을 시키거나... 저를 겁박하여 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흔들리는 여인의 시선을 마주하며 동준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돌아가신 아버님과 한 약속이 있네. 설령 내 망하는 길로 들어선다 해도, 내 스스로 걸어 들어온 것이니 후회는 없을 것이라고. 무엇보다 나는, 바다 건너 왜국과의 가교가 되어야 할 통사(通詞)라는 운명을 지고 있네."
치즈루가 동준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깊은 서러움과 함께 나직한 물음이 담겨 있었다.
"저는 지금 일본국에서도 버림받고 쫓기다 죽임을 당할 뻔한 미천한 계집입니다. 한때의 영화와 문예 따위는, 오로지 본국에서 제 죄를 더할 뿐이지요."
"......"
"나으리께서는 왜인에게 버림받은 왜인도 거두어 보살피십니까?"
동준은 찻잔을 잡듯 탁주 잔을 가만히 쥐었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며 단호히 내뱉었다.
"내게 일본국의 사정 따위는 아무런 관계가 없네. 지금 내 눈앞에는 그저, 그대만 보일 뿐이니까."
순간 방 안을 채우던 공기가 숨이 막힐 듯 고요해졌다. 치즈루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동준이 다시 가만히 운을 떼었다.
"...운문사에 당도하면 그 다음은 무언가? 그 스님은, 자네가 짐을 덜어도 좋을 만큼 믿을 만한 분인가?"
"예. 그렇다고 믿습니다. 일본 본국에 계신 가쿠잔(覺山) 스님은 저와 아버님 모두에게 목숨 같은 은인이니까요. 그분의 친우가 조선에 있는 운문사의 해월(海月) 스님이라 하셨습니다."
"일단 그곳에 당도하고 나면, 낭자와도 이제 작별이겠구려."
"...정말, 그렇습니까."
"그럴 수밖에."
"그것이 진정 나으리가 원하시는 일입니까."
동준은 차마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동준은 주모에게 닷 냥을 쥐여주고 방 두 개를 빌렸다. 내일 아침부터 한달음 더 산길을 타면 드디어 운문사에 닿을 터였다. 말을 달리면 하루면 족할 거리를, 행여나 남의 눈에 띌까 두려워 험한 산길을 에둘러 나흘이나 걸어온 길이었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려 자리를 떠나던 치즈루가, 문턱 앞에서 돌아서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으리. 내일이면 곧 당도할 터인데, 고민이 하나 남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오."
"나으리께 입은 이 큰 은혜를, 무얼로 어찌 갚아야 할지를요."
"갚을 것 없소."
"제가 비록 지금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나, 언젠가 막부의 치세가 다시 굳건해지고 제 가문의 명예가 회복되는 날이 온다면... 저희 가문은 대대로 나으리의 가문을 도울 것입니다. 반드시."
굳은 맹세처럼 뱉어진 치즈루의 말에 동준은 동요하지 않았다. 단지 장옷 깃을 다스리는 치즈루의 고운 손 매무새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부디 건강히만 지내시게. 그것이 나의 유일한 부탁일세."
해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치즈루는 조용히 머리 단장을 풀며 남색 장옷을 고이 접어 들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초가집 지붕 위로 시린 가을 달이 환하게 떠올랐다.
동준은 좁은 주막 마루에 홀로 앉아 달빛을 바라보았다. 시린 밤바람을 맞으며, 문득 십여 년 전 철종 임금 치하의 사역원(司譯院)에서 훈련받던 서늘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매일 사역원 바카라방 구석에 처박혀 수백 권의 왜서와 관견록을 읽어댔고, 동래로 파견된 훈도를 수행해 초량왜관 설바카라(設柵) 어귀를 지키며 왜인들이 쏟아내는 억센 왜음을 귀가 닳도록 받아 적어야 했던 때도 있었다. 광해군 시절 맺어진 기유약조(1609년)의 조문과 통신사행 등록(謄錄)들을 뼈를 깎듯 분석했다. 《첩해신어(捷解新語)》의 어휘를 밤낮으로 외우고, 몰래 들여온 왜국의 고문인 《겐지모노가타리》와 하이쿠까지 섭렵하던 날들도 있었다.
그 치열했던 이십 대 초반의 어느 날, 동준은 되려 사역관 교관에게 당돌하게 물은 적이 있었다.
"어째서 조선은 도쿠가와 쇼군이 아닌, 한낱 대마도주와 약조를 맺어 교역하는 것입니까?"
교관은 귀찮은 듯 붓을 던지며 동준의 질문을 피해 가려 했다. 그러나 학구열에 불타던 젊은 동준의 질문은 집요하게 이어졌다.
"대마도는 조선의 번국(藩國)입니까?"
"그렇지. 우리에게서 직인을 받고 세사미두를 타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어찌하여 대마도는 동시에 에도 막부의 쇼군에게 다이묘로서 참근교대(参勤交代)를 하며 충성을 바치는 것입니까? 어찌 두 주군을 섬기는 족속들과 교린(交隣)을 한단 말입니까."
교관이 미간을 구기며 싸늘하게 내뱉었었다.
"네놈이 뭘 안다고 떠드느냐! 왜놈들은 결국 다 금수 같은 야만인들이니, 그들의 예법에 크게 기대할 것이 못 된단 말이다!"
동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표해록》을 쓴 옛 영감들은 왜국의 문자 수준이 별볼일 없다 폄하하였습니다. 그러나, 통신사행을 다녀온 누군가는 이토 진사이(伊藤仁斎)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같은 자들을 조선 유학의 대가들과 비견할 만한 학자라 칭하더이다. 야만의 나라에 어찌 그런 학문이 있단 말입니까!"
교관은 더 이상 이 오만하고 영특한 제자를 윽박지르기만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현실의 서늘한 내막을 짚어주었다.
"우리가 모르는 줄 아느냐. 알면서도 덮어두는 것이다. 자네, 왜 그들이 통신사행 의례에서 쇼군을 배알하는지 그 진짜 연유를 아는가? 쇼군이 조선의 국왕과 동급이라는 뜻이야. 그러면, 그 막부 뒤에 숨겨진 상징적인 권력자인 '천황(天皇)'이라는 자는... 조선의 왕보다 그 격이 위라는 얘기가 되거든."
그때서야 동준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었다. 일본 교토에, 허수아비인 줄만 알았던 '황제'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언젠가 바다 저편에서 그 황제라는 칭호를 앞세워 막부를 뒤엎으려는 존왕(尊王)의 칼바람이 불어닥칠지도 모른다는 예찰. 그 서늘한 존재가 이윽고 조선의 왕권을 짓누르는 명분으로 날아들 날이 올 것만 같아, 젊은 날의 동준은 밤을 새워 번민하고 또 고민했었다.
십여 년 전의 서늘했던 기억이 달빛을 타고 흘러, 역과 급제 직후 대원군 이하응 대감에게 몰래 밀어 넣었던 밀봉된 밀소(密疏)가 기억에서 되살아났다.
다만, 그 생각을 지금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잠자리에 들 시간이 훨씬 지난 터였다.
내일 치즈루를 운문사에 무사히 의탁하고 나면, 자신은 지체 없이 사역원으로 복귀해야 한다. 허나, 운현궁에서 곧 기별이 당도할 것이라던 비선 전령의 은밀한 귀띔이 그의 발목을 묵직하게 잡고 있었다.
현재 조선의 가장 서늘하고 거대한 최고 권력자, 대원군 이하응. 그는 과연 일개 역관인 동준에게서 무슨 쓸모를 엿보고 부름을 내린 것일까.
1864년의 시린 달빛 아래, 동준의 시선이 어두운 산 능선을 넘어 멀고 먼 한양을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