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 바카라 (柵)

1864년 11월 2일, 운문사

by밤톨


사찰에 당도했을 때, 해는 이미 다시 한번 능선 너머로 몸을 감춘 뒤였다.

차가운 가을 산바람이 풍경(風磬) 끝을 때릴 때마다 서늘한 쇳소리가 도량의 적막을 흩뜨렸다.


은밀히 그들을 맞이한 해월(海月) 스님은 노회한 주름 속에 바위 같은 풍모의 노승이었다. 남색 장옷을 푹 눌러쓴 치즈루를 찬찬히 살피던 해월은, 이내 주름진 눈매를 휘며 나직한 왜어를 건넸다.

"여긴 안전하니 걱정 놓으시게. (ここは安全だ. 心配しないで)"

어눌하지만 온기가 배어 있는 그 몇 마디에, 줄곧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치즈루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려 내렸다. 세 사람은 곧 사랑방으로 자리를 옮겨, 서늘하게 굳은 몸을 녹이며 지난한 여정의 회포를 짧게 풀었다.

"가쿠잔 스님과는 젊은 시절 쓰시마에서 다도(茶道)로 연을 맺었지요. 그 깐깐한 양반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보낸 분이라니, 긴말 할 것 없이 이 늙은이 곁에 두면 됩니다."


비구니들의 처소 끝자락, 인적이 닿지 않는 외딴 방 하나가 그녀에게 주어졌다. 오랫동안 장작을 때지 않아 구들장에는 한기가 돌았으나, 쫓기는 자에게는 그마저도 과분한 안식처였다.


여장(旅裝)을 내려놓은 치즈루가 문지방에 서서 물끄러미 동준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는 안도감과 함께,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깊은 아쉬움이 묻어났다.


그러나 동준은 묵묵히 자신의 옷깃을 여밀 뿐이었다. "이제 낭자의 몫이오. 부디 살아남으시오."


인사는 짧고 건조했다. 동준은 치즈루가 미처 답례의 절을 올리기도 전에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등 뒤로 그녀의 시선이 못 박히듯 와닿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스스로 그어둔 국법과 연민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지 않으려는 듯, 지독히도 매정한 작별이었다.


산문을 나선 동준은 말안장에 오르자마자 거칠게 고삐를 쥐었다. 말굽 소리가 차가운 밤안개 속으로 빠르게 바스러졌다.


그리고 미처 맺지 못한 인사처럼, 짧았던 가을 해는 그렇게 저물었다.




동준은 밤새 차가운 영남대로를 갈라 새벽안개가 걷히기 전 한양 도성에 당도했다. 숭례문 인근의 역관에서 거친 숨을 고르며 잠시 여독을 푼 그는 지체 없이 사역원(司譯院)으로 향했다.


종로 수송방(壽松坊) 어귀에 자리 잡은 사역원은 언제나처럼 낡고 고루한 활기로 소란스러웠다. 겹겹이 쌓인 이국의 서바카라에서 묵은 종이 냄새가 풍겼다. 한어와 왜어, 몽어가 뒤섞인 기묘한 음성들이 묘하게 뒤엉켜 있었다.

왜학관 대청마루에 줄지어 앉은 학동들은 백 년도 더 된 《첩해신어(捷解新語)》의 문장들을 기계적으로 암송했다. 그 소리가 서늘한 가을 허공을 맴돌았다. 바다 건너 열도의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핏빛으로 끓어오르며 요동치고 있건만, 마치 그 거대한 격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 조선의 역관들은 빛바랜 교재 속 활자만을 앵무새처럼 읊어대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안 찰방." 서고의 깊은 먼지 냄새 속에서 옛 교관이 반갑게 동준을 맞았다.

두 사람은 서안을 사이에 두고 앉아, 최근 대마도에서 은밀히 건너온 일본의 서바카라과 장계들을 펼쳤다. 지난 일 년, 필묵 너머로 전해지는 일본의 궤적은 심상치 않았다. 서양 함대의 가고시마 포격, 그리고 두 달 전 교토를 불태운 금문의 변(禁門の變)까지. 260년을 이어온 도쿠가와 막부의 철권통치는 이미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조슈와 사쓰마의 무사들이 저리 칼을 빼 들고 날뛰니, 막부의 명운도 다한 것 아니겠습니까. 도성의 대감들은 이 소용돌이를 어찌 보고 계십니까?"

동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교관이 서바카라을 덮으며 끌쯧 혀를 찼다. "어찌 보긴. 짐승 같은 왜놈들이 제들끼리 권력을 놓고 물어뜯는 야만의 난장판일 뿐이라 하시지. 우리는 그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성리학의 맑은 도리만 지키면 된다는 게 조정의 뜻일세."

동준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폭풍이 몰려오는데 문풍지만 덧바르려는 형국이었다. 그가 입을 굳게 다문 찰나, 다급한 발소리가 서고의 정적을 무참히 깨뜨렸다.


"안동준 훈도를 찾으시오! 운현궁(雲峴宮) 대감마님의 부름이오!"

동준은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현궁의 공기는 한겨울의 우물 밑바닥처럼 무겁고 서늘했다.

권력의 정점에 선 대원군 이하응은 묵향이 짙게 밴 서안 너머에 거대한 바위처럼 앉아 있었다. 미동조차 없는 그의 자세와, 가늘게 뜬 눈길 사이로 번뜩이는 예리한 안광은 그저 방 안에 함께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살갗을 찌르는 듯한 위압감을 뿜어냈다.

"그래, 변방의 바람 냄새는 어떠하냐. 바다 건너 왜놈들의 동향을 고해보라."

동준은 차가운 마루에 엎드린 채,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조슈번의 궐기와 막부의 쇠락, 천황을 앞세우려는 존왕파의 움직임 등 핵심적인 징후들만이 정제된 언어로 흘러나왔다. 대원군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동요도, 호기심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내 그의 입에서, 칼날처럼 서늘하고 엉뚱한 화두가 툭 던져졌다.

"요즘 도성 내에 사학(천주교)을 맹신하는 무리들을 은밀히 솎아내고 있다. 네놈은 어찌 생각하느냐?"

동준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켰다.

"사학의 사특함(邪慝함)이 변방 동래에까지 번지고 있사오나...... 비록 미혹된 백성일지라도 성인의 덕(德)으로 교화한다면 본래의 도리로 돌아올 날이 있을 줄로 사료되옵니다."


그 대답에 대원군의 붓끝이 일순간 멈췄다. 적막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내 장모가 천주학쟁이인 것은 아느냐."

동준이 숨을 멈추자, 대원군의 입가에 서늘한 냉소가 스쳤다.

"나도 본디 피를 즐기는 모진 놈은 아니다. 허나, 안팎으로 무너져가는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조선의 뼈대를 다시 세우려면, 때로 국정은…… 사람의 정보다 모질고 엄해야 하는 법."

대원군의 목소리에는 국가를 지키겠다는 맹수 같은 집념과, 그 과정에서 흘려야 할 피를 마다하지 않겠다는 서릿발 같은 고독이 엉켜 있었다. 짧은 침묵 끝에, 동준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열었다.

"교(敎)와 사(邪)를 엄격히 가르는 것은 국정에 요긴한 일이나…… 공(公)을 내세워 인(仁)을 해치는 것은 사대부의 도리가 아닐까 저어되옵니다."


일순간 대원군의 눈빛이 번뜩였다. 분노인지, 흥미인지 모를 묘한 광채였다.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곁눈질 한 번 주지 않고 묵묵히 먹을 듬뿍 찍어 난을 쳤다. 더는 묻지 않겠다는, 무겁고도 단호한 축객령(逐客令)이었다.




한양을 떠나 동래로 다시 내려가는 내내, 역참 말을 달리는 동준의 귓가에는 대원군의 음성이 유령처럼 맴돌았다.


'국정은 때로는 사람의 정보다 모질고 엄해야 하는 법.'


동준은 채찍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영남대로를 내달리던 그는, 경상도 어귀의 갈림길에 이르러 자신도 모르게 운문사 쪽으로 말고삐를 틀어 버렸다. 해월 스님이나 치즈루에게 다시 가겠다는 기별 따위는 한 적이 없었다. 공무를 핑계로 서둘러 복귀해야 할 관원이 왜 바쁜 일정을 쪼개어 다시 험한 산사로 발길을 돌리는지, 동준은 스스로에게조차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그저 그녀가 진정 무탈한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


운문사 어귀에 다다르자 동준은 거칠게 말고삐를 당겼다. 짐짓 태연한 척 안색을 굳혔으나, 안장에서 뛰어내리는 몸놀림에는 미처 다 억누르지 못한 조급함이 묻어났다. 그는 애써 뒷짐을 지고 점잖게 산문(山門)을 들어섰다. 하지만 마음이 몸을 앞지른 탓에 보폭은 평소보다 훨씬 넓고 컸다.


그러나 떠난 지 스무 날 만에 다시 밟은 도량 안은 이상하리만치 적막했다.

승려들의 염불 소리나 발자국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기묘한 고요 속에서, 바람에 쓸리는 마른 낙엽 소리만이 귓가를 서늘하게 때렸다. 동준은 며칠 전 차를 나누었던 사랑방으로 다가가 미닫이문을 열었다. 텅 비어 있었다. 싸늘한 냉기만이 동준을 반겼다.

미간이 일그러졌다. 가슴 밑바닥에서 알 수 없는 서늘한 쇳덩이 같은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처소 끝자락, 외딴 방을 향해 걷는 그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타닥, 타닥. 돌계단을 밟는 가죽신 소리가 다급한 마찰음을 내며 산사의 정적을 갈랐다. 선비의 잰걸음은 이미 헐떡이는 뜀박질로 변해 있었다.

거친 숨을 토해내며 당도한 방문 앞. 동준은 왈칵 장지문을 열어젖혔다.

믿었던 방 역시 한겨울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방안을 덥히던 희미한 온기도, 그녀의 옷자락에 묻어 있던 이국의 옅은 분 내음도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다.


"나으리 가시고, 바로 그날 새벽 홀연히 떠났더이다. 산짐승이 들었거나 억지로 끌려간 낌새는 전혀 없으니,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요."

스님의 말대로였다. 누군가 침입한 흔적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머물던 얇은 요와 베개는 마치 군영의 그것처럼 모서리가 칼같이 각이 잡힌 채 정갈하게 개켜져 있었다. 사무라이의 딸. 방 안의 서늘한 정돈 상태가 그녀의 단호한 결기를 묵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단 한 장의 쪽지도, 알량한 핑계 한 줄도 없이, 여인은 세상에서 흔적을 지우듯 온데간데없이 증발해 버렸다.


동준은 텅 빈 구들장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묵직한 돌덩이가 가슴 밑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져 내렸다.

'어디로 간다는 기별도 없이… 왜인의 몸으로, 이 조선 땅에 홀로 발을 딛고 살아가겠다는 말이요.'

이내 야속한 마음까지 차올랐다.

'참으로 제멋대로인 여인이로구만.'


동준은 차가운 마루 위에 굳어버린 듯 섰다.

며칠 전 자신이 매정하게 등 돌리며 남겨두었던 그 붉은 일몰을, 이번에는 홀로 남아 오래도록 마주하고 있었다.





커버사진: Unsplash의 Niclas Il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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