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 바카라 (柵)

1864년 10월 30일, 금정산길

by밤톨


그 찰나 같던 밤이 지나고, 계절은 무심하게도 참으로 고요히 흘렀다.

한 달이 지났다.


관아와 역참의 번뜩이는 눈길을 피해 치즈루가 숨어든 곳은 역관 구석의 비좁고 어두운 다락방이었다. 아무리 은밀하다 한들, 역참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충직한 역졸 만석의 눈까지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사정을 털어놓고 치즈루를 마주하게 한 날, 장옷을 벗어 내린 이방의 여인을 본 만석은 넋이 나간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따, 나으리…… 천하의 역적 첩자인 줄 알고 간이 콩알만 해졌더니만, 참말로 곱네 고와요."

그 실없는 감탄사 한마디에 얼음장 같던 방 안의 공기가 스르르 풀렸다.


허나 안도는 찰나였고, 일상은 얇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로웠다. 끼니마다 제 몫인 양 밥상을 몰래 빼돌려 치즈루에게 나르는 것은 온전히 만석의 몫이 되었다. "나으리 모시랴, 왜국 색시 챙기랴, 내가 제 명에 못 살지."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만석은 주방 사령들의 감시망을 기가 막히게 피해 다녔다.

"어이 만석이, 요새 왜 자꾸 밥을 곱빼기로 퍼가나? 배에 회충이라도 들었는가?"

사령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따져 물을 때면, 만석은 보란 듯이 제 배를 두드리며 넉살을 떨었다. "환절기라 그런가, 돌아서면 배가 쑥쑥 꺼지는 뎁쇼! 장정 놈이 밥심으로 말똥도 치우고 마당도 쓰는 거지, 굶고 일합니까?" 그 아슬아슬한 농지거리 너머, 치즈루는 쥐 죽은 듯 다락방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낮 동안 동준이 그녀에게 건넬 수 있는 유일한 다정함은 읽을 만한 한문 서바카라 몇 권을 남몰래 밀어 넣어주는 것뿐이었다. 동준이 왜관으로 나가 일본 상인들과 관리들의 까다로운 서계를 번역하고 지친 걸음으로 돌아오면, 치즈루는 아침에 두고 간 그 자리, 그 자세 그대로 흐트러짐 없이 앉아 조용히 바카라장을 넘기고 있었다.


어스름이 내리고, 사위가 먹물처럼 짙은 어둠에 완전히 잠겨서야 동준은 다락방 문을 열었다.

"답답했을 터인데, 잠시 바깥바람이라도 쐬시오."

그렇게 두 사람은 인적이 끊긴 고요한 밤이 되어서야 마루 끝에 나란히 앉아 차를 나누거나, 왜관 너머 아득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역참 뒷동산 언덕을 걸었다. 오가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저 묵직한 침묵 속에서 나란히 걷는 발소리와 서로의 숨결로 안부를 확인할 뿐이었다.


"낭자, 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대체 무엇이 보이오?"

바다를 하염없이 응시하던 치즈루가 나직한 이국의 말로 답했다.

"바다 건너, 제 고향이 보입니다."

"그 먼 곳이…… 정말 보인단 말이오? (そのように遠き処が……真に見えるというのか。)"

치즈루는 슬픔이 묻어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동준을 돌아보았다.

"예, 나으리. 제 눈에는 보입니다. (はい、我が目には、確と見えておりまする。)"

그 가녀린 눈동자에 일렁이는 짙은 향수와 서늘한 결기는 동준의 가슴 한구석에 묻혔다. 그러나 이 위태로운 숨바꼭질을 마냥 이어갈 수는 없었다. 왜관 주변의 감시망이 하루가 다르게 촘촘해지자, 동준은 마침내 관내 순시를 핑계로 사역원에 말미를 얻었다. 치즈루를 운문사의 해월 스님에게 의탁하기 위한, 멀고도 은밀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시월의 가을 산은 붉었다.

붉다 못해 서럽게 타오르는 단풍잎이 바람에 스러졌고, 발을 디딜 때마다 바스락대는 낙엽 소리가 텅 빈 산천을 메웠다. 앞서 걷던 동준이 보폭을 살짝 줄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남색 장옷을 푹 눌러쓴 치즈루는 그 험한 산길에도 거친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묵묵히 동준의 그림자를 밟으며 걷고 있었다. 걸음걸이는 정갈했으나, 치맛자락 밑으로 엿보이는 짚신은 진흙에 젖어 이미 처참히 닳아 있었다. 공무를 핑계로 빼낸 걸음이라 마음이 타들어 갔으나, 창백해진 여인의 안색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동준이 길가 그루터기에 걸음을 멈추고 짐짓 무심한 투로 입을 열었다.

"낭자는 원래 그리 과묵하시오. 아니면, 나라를 등진 무게가 입술마저 짓누르는 것이오?"

치즈루가 장옷 깃을 여미며 조용히 동준을 올려다보았다.

"나으리의 보폭이 일정하여, 그 박자를 맞추느라 소리를 아낀 것뿐입니다."

"박자를 맞춘다라. 내 걸음이 그리 급했소?"

"급하기보다는…… 마음이 먼저 가 계신 듯하였습니다."

그 차분하고도 예리한 음성에 동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제 속내를 이리도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눈썰미라니. 동준은 머쓱함을 감추려 괜히 헛기침을 했다.

"어허, 국법을 어기고 정체 모를 여인을 빼돌리는 길이니 마음이 급한 게 당연하지 않소. 그나저나 조선의 산길이 왜국보다 험할 터인데, 다리는 괜찮소?"

치즈루가 제 닳은 발끝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눈빛에 조그만 장난기가 일었다.

"나으리께서 가을 산길을 걸으며 낭만을 버리면 남는 건 '족통(足痛)'뿐이라 하셨지요. 참으로 명언이십니다. 지금 제 다리가 딱, 그렇습니다."

"어라. 내가 한 달 동안 역관에서 했던 그 실없는 소리들을 다 기억하고 계셨구려?"

"위로라기보다는…… 나으리의 긴장을 조금 풀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 계셔서요."


치즈루는 길가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집어 들더니, 평평한 바위 위로 다가가 단정한 해서체로 글자 하나를 새기듯 적어 내려갔다.


秋


"저희 땅에서는 이것을 '아키'라 읽고, 조선에서는 '가을'이라 부른다 하셨지요. 소리는 이리 다르나, 글자를 바라보는 쓸쓸함과 가을 산의 서늘함은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동준은 바위에 새겨진 유려하고도 강직한 필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무가(武家)의 투박함 대신, 오히려 학문의 기품이 배어 있었다.

"낭자, 필치가 제법 단정하구려. 서바카라을 꽤 읽었소?"

"아버님께서는 스스로 무사라 하여 칼만 아는 것을 늘 경계하셨습니다. 글을 읽어 마음을 닦아야 비로소 인(仁)을 알고, 칼을 뽑아야 할 때와 거두어야 할 때를 가릴 줄 안다 하셨지요."


동준의 시선이 바위 위의 한자를 넘어 치즈루의 단아한 얼굴에 머물렀다. 그간 왜관에서 숱하게 마주했던 왜인들은 술에 취해 칼자루를 쥐고 고함을 지르는 무사이거나, 이문에 눈이 멀어 셈을 하는 상인들이 전부였다. 야만의 땅이라 여겼던 그 바다 건너에, 사역원의 낡은 훈도록 그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던 여인이 서 있었다. 군자의 도리와 칼날의 서늘한 경계가 가을 산그림자 속에 은은하게 겹쳐졌다.


바위 위의 글자와 흙투성이가 된 여인의 발끝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동준이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이 가을 산이 한결 고요해 보이는구려."

치즈루가 가만히 눈을 맞추며 작게 목례를 올렸다.

스산한 바람이 두 사람의 옷깃을 스치고 지날 때마다, 붉은 잎들이 조용히 길 위를 덮고 있었다.




같은 시각, 짙은 바다 냄새와 사람들의 거친 고함이 뒤엉킨 초량왜관의 선창은 소란스러웠다. 남빛 바다, 저 수평선 너머에서 닿은 대마도의 왜선들이 삐걱대며 닻을 내리고 있었다. 길게 늘어선 목조 부두 위로는 인삼과 은괴, 놋그릇과 비단 궤짝들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밧줄을 당기는 짐꾼들의 소리가 파도에 부서졌다.


그 번잡한 선창 한복판에 유난히도 꼿꼿이 선 사내가 있었다. 무사 사토 겐지로.

그가 호위하던 관수왜(館守倭)가 대마도주의 시급한 부름을 받고 본국으로 귀환하는 길이었다. 가을 햇살을 머금은 겐지로의 칼집은 깊고 검었으며, 그의 시선은 지평선 너머 바다에 고정되어 있었다.


곁에 선 관수왜는 값비싼 비단옷자락을 매만지며 연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으허허, 보아라! 전하께서 이리 급히 부르시는 이유가 달리 있겠느냐? 내 이번에 번의 곳간을 두둑이 채워 드렸으니, 이제 마땅한 논공행상이 따를 차례지!"

그는 가슴을 한껏 편 채 미소를 흘렸다. 바다 건너 열도에서 막 타오르기 시작한 유신지사들의 핏빛 투쟁이나, 설바카라 너머 조선과 얽힌 아슬아슬한 정세 따위는 애초에 그의 알 바가 아니었다. 오직 제 한 몸의 안위와 왜관의 무역으로 주머니에 채워 넣을 은괴만이 그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다.

"겐지로! 너도 나와 함께 대마도로 건너가면 아주 좋은 자리를 얻게 될 터이다. 내가 도주 전하께 널 무어라 치켜세웠는지 아느냐? '이자가 바로 대마도와 규슈를 통틀어 으뜸가는 검객입니다!' 하고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해두었단 말이다!"

관수왜는 겐지로의 어깨를 툭툭 치며 거들먹거렸으나, 그 얄팍한 눈빛 어디에도 심복을 향한 신뢰나 무사를 향한 예의는 없었다. 그저 제 권세를 빛내줄 날카롭고 비싼 칼 한 자루. 그것이 전부였다.


겐지로는 주인을 향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삼가 명심하겠습니다, 나으리."

그뿐이었다. 겐지로의 목소리는 부서지는 파도 소리보다 낮고 건조했다. 선창가에 쌓인 무명 자루 위로 붉은 노을빛이 길게 베이듯 스며들었다. 거세진 바닷바람에 돛대를 묶은 밧줄은 활시위처럼 팽팽했고, 찬 공기가 두 사람의 옷자락을 매섭게 흔들었다. 겐지로는 주인의 등 뒤, 정확히 반 보 물러선 자리에 미동도 없이 서서, 바다 너머 어스름이 내리는 수평선만을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거친 현해탄을 가른 배는 나흘 뒤 대마도 남쪽의 이즈하라 포구에 닻을 내렸다.


사방을 에워싼 가파른 절벽과 잿빛으로 출렁이는 바다. 대마도의 포구는 숨이 막힐 듯 삼엄했다. 항구를 뒤덮은 안개 사이로 번의 왜선들은 창끝처럼 빽빽하게 돛대를 세우고 있었다. 배가 부두에 닿기가 무섭게 관수왜는 호사스러운 행색을 뽐내며 가장 먼저 뭍으로 발을 디뎠다. 겐지로는 여전히 반 발자국 물러선 자리에서 주위를 기민하게 살폈다.


선창 한구석에 마련된 지붕 밑에 한 노승이 서 있었다. 가쿠잔(覺山)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승은 낡은 묵주를 쥔 채, 배에서 내리는 무리를 조용히 응시했다.


관수왜가 반색하며 노승에게 다가갔다.

"오, 가쿠잔 장로(長老) 아니십니까. 누추한 속인의 걸음에 이리 몸소 마중을 나와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가쿠잔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예를 갖추었다. 그러나 노승의 시선은 관수왜의 가벼운 너스레를 지나쳐, 그의 등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겐지로의 얼굴에 가 닿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차가운 허공에서 부딪혔다. 노승의 눈빛이 소리 없이 묻고 있었다.

'네가 설바카라 너머로 보낸 그 천 마리의 학(千鶴, *치즈루)은, 무사히 길을 떠났느냐.'

겐지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관수왜가 돌아서지 않는 그 찰나의 틈을 타, 가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단 한 번의, 무거운 예를 올렸을 뿐.


포구 위로 서늘한 갯바람이 휘감아 돌았다. 거친 갯바위를 넘은 그 바람은, 붉은 단풍이 사무치게 스러지고 있을 조선의 깊은 산사, 운문사를 향해 불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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