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 바카라 (柵)

1864년 9월 26일, 교토

by밤톨


구월의 밤기운은 본래 선선하고, 늦여름 꽃들의 향이 희미하게 감도는 법이다.


하나, 그날의 교토는 달랐다. 정취가 머물 자리에는 한 달 전 금문의 변(禁門の変)이 남긴 짙은 피비린내가 배어 있었다. 거리 곳곳에 화염에 그을린 목재 잔해가 어지러웠고, 무너진 담장 너머 불탄 가옥의 뼈대가 흉물스러웠다. 막부 군과 아이즈 번사들은 떼를 지어 순찰을 돌았다. 얼어붙은 밤공기를 가르는 거친 군화 소리와 간간이 부딪히는 창칼의 쇳소리가 어둠을 서늘하게 긁었다.


삼엄한 길목을 피해 한 사내가 그림자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쓰시마번의 통사, 모리야마 시게루(森山 茂)였다. 주변을 살피며 가모가와(鴨川) 강변으로 빠져나온 그는 이름 없는 허름한 료칸 문을 열고 안으로 몸을 숨겼다.


불조차 켜지 않은 작은 방 안, 창밖의 어둠을 홀로 응시하는 사내가 있었다.

상급 무사의 하카마 대신 걸친 거친 노기모노(野着物) 차림이었다. 짙은 감색 무명옷은 도피의 날들을 증명하듯 소매 끝이 해져 있었고, 교토 골목의 그을음과 흙먼지가 배어 있었다.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모리야마 군."

천천히 돌아선 사내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가늘게 빛났다. 쫓기는 자의 피로와 검객의 서늘한 기운이 기묘하게 엉킨 시선이었다. 조슈의 카츠라 코고로(桂 小五郎)였다.

"카츠라 선생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지금 교토 전체가 조슈의 지사들을 사냥하느라 혈안입니다. 골목마다 막부 군이 깔렸고, 칼잡이 순찰대(新選組) 놈들이 밤마다 칼을 세우고 다닙니다."

"사냥이라……."

카츠라가 씁쓸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울리는 표현이군. 하나, 진짜 늑대는 사냥당하지 않네. 잠시 발톱을 숨길 뿐이지."

카츠라는 식어버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도자기의 감촉이 손끝을 스쳤다.

"금문의 변 이후로 우리는 졸지에 조정의 적이 되었네. 아이즈와 사쓰마가 손을 잡을 줄이야. 쓰러진 동지들의 얼굴이 밤마다 눈에 밟히지만……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은 대로 쓰임이 있는 법이지."

그는 잠시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하지만 모리야마,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세. 서양 오랑캐들은 함포를 앞세워 해안을 조여오는데, 막부는 썩어 문드러져 대바카라 하나 내놓지 못하고 있네. 이제 '존왕양이(尊王攘夷)'는 단순히 오랑캐를 배척하는 구호가 아니네. 새로운 일본을 세우는 서슬 퍼런 칼날이 되어야 해."




—쿵. 쿵. 쿵.

바깥문을 거칠게 짓찧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막부의 사냥개들인가?"

모리야마가 숨을 삼키며 속삭였다. 창살 틈 어둠 너머로 특유의 톱니 무늬가 새겨진 푸른 옷자락이 어른거렸다.

"선생님, 둘뿐인 듯합니다."

망을 보던 조슈의 무사가 문틈을 비집고 들어와 귓가에 낮게 읊조렸다.

"……해치울까요?"

카츠라는 말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눈빛만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안으로 들여서…… 소리 없이 끊게."

"예."

"지난여름 이케다야(池田屋)에서 뼈에 새겼네. 삶과 죽음은 결국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카츠라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칼자루를 쥐는 그의 손가락 마디에 미세한 힘이 들어갔다.

"내게 천명이 남아 있다면, 오늘 밤 저따위 칼날에 목을 내주지는 않을 걸세."

밖에서 료칸 주인의 아들 행세를 하던 사내가 허리를 굽히며 넉살 좋게 문을 열었다.

"아이고, 나으리들! 이 깊은 밤에 순찰이라니 노고가 많으십니다."

그는 등불을 낮게 들고 앞장섰다.

"이쪽입니다. 방들이 워낙 누추하여……."

앞선 대원이 코웃음을 치며 문지방을 넘는 찰나였다. 길을 안내하던 사내가 품속에서 비수를 뽑아 올려 대원의 옆구리와 등뼈 사이를 가차 없이 찔러 넣었다. 비명은 목구멍을 넘지 못하고 꺾였다.

"네놈—!"

뒤따르던 대원이 기겁하며 칼자루로 손을 뻗는 바로 그 순간.

—콰직.

닫혀 있던 장지문 문풍지를 뚫고 한 줄기 서늘한 칼날이 벼락처럼 튀어나왔다. 방 안에서 카츠라가 내지른 검이었다. 칼날은 대원의 흉통을 뼈째 부수며 등 뒤로 빠져나왔다.

피거품이 튀며 사내가 둔탁하게 꺾여 무너졌다.

슥, 하고 장지문 너머로 칼이 거두어졌다. 문풍지에 난 찢어진 틈새로 눅진한 피비린내와 함께 카츠라의 차가운 눈동자가 언뜻 비쳤다.

"선생님……."

부하가 헐떡이며 칼날의 핏물을 털어냈다. 카츠라는 장지문을 열고 나와 미동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루에 고이는 피 웅덩이 위로, 식어가는 사내들의 기름 냄새와 밤바람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방 안의 어둠 속에서 모리야마는 가만히 카츠라를 응시했다. 살을 에는 밤바람을 뚫고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

"자네를 부른 까닭은 짐작하겠지. 우리 중 자네만 한 '조선통'은 없으니까."

"얼마 전까지 부산 왜관에 머물다 번주의 급한 전갈을 받고 올라왔습니다. 금문의 변으로 타격이 이토록 클 줄은 몰랐습니다. 앞으로 우리 근왕의 지사들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이리 도망만 다녀서는 막부 놈들을 당해낼 재간이 없지 않습니까."

"쓰시마 번주는 무어라 하던가?"

모리야마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흔들리는 눈빛 속으로 복잡한 그늘이 스쳤다.

"번주께선…… 겉으로는 조슈와 사쓰마의 뜻을 따르고 계십니다. 이미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터라 물러설 길도 없습니다."

모리야마는 말을 멈추고 카츠라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선생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쓰시마는 조선과의 무역이 곧 목숨줄입니다. 수백 년간 이어온 그 통로와 이익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번의 중신들도 선뜻 칼을 뽑지 못할 것입니다."

카츠라가 낮게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때가 되면 번(藩)도, 도주(島主)도 모두 옛 무덤 속으로 들어갈 걸세. 우리 일본은 군(郡)과 현(縣)으로 갈라질 것이며, 만세일계의 천황 폐하께서 친히 통솔하는 단 하나의 칼이 될 것이네. 서양 오랑캐들이 함포를 들이밀어도 함부로 넘보지 못할 그런 나라 말일세."

"하지만 선생, 그간 우리 쓰시마는……."

모리야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무릎 위에 얹은 그의 주먹에 핏줄이 돋았다. 대마도 사내들의 뼛속에 대를 이어 응어리져 있던 굴욕감이 기어이 터져 나왔다.

"조선 조정에 머리를 조아리며 연명해 왔습니다. 왜관 설바카라 밖으로는 발 한 짝도 마음대로 딛지 못하고, 조선 국왕이 내려준 관작(官爵)과 도서(圖書)를 감지덕지 받들며 그들의 가짜 신하 노릇을 해왔습니다! 대일본국의 무사가 언제까지 그런 치욕을 감내해야 한단 말입니까?"

카츠라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모리야마를 똑바로 응시했다. 문풍지 너머에서 흘러든 피비린내가 두 사람 사이에 서늘하게 맴돌았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두고 도망자라 손가락질하지. 허나 모리야마, 나는 지금 굴신(屈伸)을 하고 있는 것이네. 웅크릴 줄(屈) 모르는 칼날은 결코 멀리 뻗어 나갈(伸) 수 없는 법이니까. 쓰시마가 견뎌온 세월도 마찬가지 아닌가?"

모리야마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카츠라는 소매에서 구겨진 지도를 꺼냈다. 어두운 탁자 위에 지도를 거칠게 펴 바르더니, 주름진 종이 위를 메마른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그의 손끝이 멈춘 곳은 바다 건너 조선 반도였다.

"지금 우리 일본은 내란의 불길 속에서 신음하고 있네."

카츠라의 목소리가 바닥을 기듯 낮게 깔렸다.

"하지만 이 불길이 꺼지고 난 뒤를 생각해보게. 넘쳐나는 무사들의 살기, 서양식 총포로 무장할 막강한 군대. 그 거대한 힘을 어디로 쏟아내야 하겠는가? 우리에겐 출구가 필요하네."

모리야마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정한(征韓)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히데요시 태합(太閤)의 길을 다시 걷겠다는 뜻입니까?"

"그때와는 판이 완전히 다르네."

카츠라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당시에는 천하의 대국이라던 명(明)과 조선을 동시에 상대했기에 꺾인 것일세. 하지만 지금 대륙을 보게. 불과 몇 해 전, 저 광대한 천하의 주인이라 거들먹거리던 청국 황제가 서양 오랑캐의 함포 몇 방에 북경을 버리고 열하(熱河)로 도망치지 않았나. 원명원의 만 가지 보물이 잿더미로 화하고, 황제는 만리장성 너머 피난지에서 굴욕 속에 피를 토하며 죽었네."


촛불 그림자 너머 카츠라의 눈빛 속에서, 참수당한 스승 요시다 쇼인의 서슬 퍼런 광기가 스쳐 지나갔다.

"모리야마, 날이 밝는 대로 부산 왜관으로 돌아가게. 조선의 속내를 꿰뚫어 봐야겠네. 섭정을 쥐었다는 흥선대원군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조정이 어디까지 대비하고 있는지."

카츠라의 굵은 손가락이 지도 위 바닷길을 길게 그었다.

"특히 저들의 역관들을 살피게나. 훗날 우리가 바다를 건널 때, 안에서 빗장을 풀어줄 놈이 필요해."

모리야마가 칼자루를 틀어쥔 채 마른침을 삼켰다.

"명심하겠습니다. 동래 역참에 안동준(安東晙)이라는 젊은 왜학 역관이 자청해 내려와 있습니다. 왜관 사정에 귀신같이 밝고 배포가 보통이 아니라 하니, 그자부터 은밀히 짚어보겠습니다."

"안동준……."

카츠라가 그 이름을 입안에서 낮게 굴렸다. 그는 무릎 위에 놓인 칼집을 엄지손가락으로 툭 밀어 올려, 칼날의 서늘한 은빛을 반 치쯤 드러냈다.

"쥐새끼처럼 숨어 다니는 이 도망자의 세월도 머지않았네. 칼집을 완전히 깨뜨리고 본토 밖으로 칼끝을 겨누는 날…… 우리 신공황후께서 무릎 꿇리고 조공을 받았던 삼한(三韓)의 옛 땅을 되찾을 걸세. 뒤틀린 천하의 법도를 바로잡는 참된 복고(復古)의 날이지."

어둠 속에서 카츠라의 메마른 입술이 나직이 서늘한 시구를 읊조렸다.


서리 친 밤에 (霜の夜に)
붉게 피는 매화는 (赤く咲く梅)
야마토의 넋인가 (大和魂)



구름 뒤로 숨었던 흐릿한 달빛이 문풍지의 핏자국 위로 희미하게 내려앉았다.

기온(祇園) 골목의 붉은 등롱들은 여전히 빗물에 젖어 흔들리고 있었으나, 샤미센의 현도, 여인들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적막 속에서 죽은 살수들의 식어가는 피비린내와 젊은 사무라이들의 뒤틀린 야망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조선의 바다 너머로, 시린 서리가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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