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가 힘든 본질적인 이유는 ‘절대적 자기희생’ 때문이지 않을까. 무엇을 위해서 육아를 하냐고 물었을 때 답하기 어렵다. 어떤 보상을 바라고 육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육아는 ‘절대적 자기희생’을 수반한다. 내 시간, 공간, 에너지, 돈 등 살면서 중요한 모든 것이 아이 키울 때 필요하다. 어떤 보장된 보상 없이 이 모든 것을 아이를 위해서 쏟아 붓는다. 아이를 키워야 진짜 어른이 된다는 뜻은 여기서 시작한 말일지 모른다. 지금까지 자기 것을 키우고 지키는 삶이었다면 육아는 정반대다. 내 것을 내어주고 아이를 포함한 가족을 지키는 삶으로 바뀐다. 육아는 삶의 패러다임을 바꾼다.
바뀌는 삶의 패러다임에 적응하지 못하면 육아는 힘들어진다. 내 것을 지키는 데 익숙한 사람에게 내 것을 내주는 행위는 그 대상이 내 아이라도 용납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아이가 그것을 고마워하기는커녕 나에게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라고 떼를 쓰면 지금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지 현타가 오기도 한다.
나도 철저한 개인주의자다. 이런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 나 조차 믿기 어렵다. 나는 주말에 집밖을 나가지 않는 집돌이였다. 내 시간을 침범하지 못하게 했고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연락해서 약속 잡은 적은 거의 없다. 이 세상에 믿을 사람은 ‘나’ 뿐이었고 타인은 불확실했다. 불확실한 타인에게 내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믿을 수 있는 ‘나’에게만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것이 바람직했다.
이런 내가 여차저차 하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내 친구들은 내가 결혼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그건 모두의 예상 밖이었다. 몇 년 뒤, 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는 그때처럼 놀라지 않았다. 나는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육아는 나의 ‘절대적 희생’ 이라고 생각한 것을 자양분으로 아이와 관계를 만드는 작업이다. 처음에는 내가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나, 나와 아이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면 아이는 타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의 일부로 느껴진다. 불확실한 타인이 아니라 확실한 또 다른 나가 된다. 사랑은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불린 타인을 나의 일부로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그 순간이 오면 ‘자기희생’ 이라는 말은 다르게 해석된다.
가끔 뉴스에서 자기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를 본다. 그들은 비명처럼 운다. 자신의 죽음 보다 더한 통곡을 한다. 자식이라는 존재는 정말 그렇다. 나 보다 더한 존재. 나를 뛰어넘는 아픔이자 기쁨. 사랑할수록 네가 아닌 내가 되는 존재. 그 순간이 오면 ‘자기희생’ 이라는 말 대신에 ‘사랑’이라는 정반대의 말로 바뀐다.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 희생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오는 느낌이 강하다면 사랑은 충만한 자기 안에서 터져 나오는 에너지다. 나는 지금 그 순간을 천천히 음미하고 있다. 내가 열매에게 줄 수 있는 것을 키우고 싶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