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

by김경훈

[작업 노트]


직무 · 무대감독

극장 · 객석 120석 소극장

공연 · 2인극

회차 · 34회차 중 31회차 진행

경력 · 8년

쓰는 이유 · 증거



큐시트


무대감독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나는 순서 지키는 사람이라고 답한다.


멋있는 대답은 아니다. 사실이 그렇다.


공연은 순서다. 조명이 들어오고 음악이 나오고 배우가 들어오고 말을 하고 나간다. 그게 정해진 순서로 일어나야 공연이다.


안 그러면 그냥 사고다.


그 순서를 적어놓은 게 큐시트다.


내가 만든다. 연습 보면서 만들고 고치고 또 고친다. 초연 올라갈 때쯤이면 이백 개쯤 되는 큐가 줄줄이 적혀 있다.


공연 중에 나는 부스에 앉아서 그걸 보면서 콜을 한다.


큐 스물셋 스탠바이.


큐 스물셋 고.


이런 식이다.


조명 오퍼레이터하고 음향 오퍼레이터가 그 소리 듣고 누른다.


나는 이 일을 8년 했다.


내 큐시트는 내가 다 외운다. 외우려고 외우는 게 아니라 서른 번쯤 하면 외워진다.


그게 이 얘기의 전부다.


이 일을 왜 하냐고 물으면 나는 대답을 잘 못 한다.


돈은 안 된다. 시간도 이상하다. 낮에 자고 밤에 일한다.


그런데 공연이 순서대로 끝나면 기분이 좋다.


백여든일곱 개가 하나도 안 어긋나고 끝나면 부스에서 혼자 좀 웃는다.


아무도 모른다. 관객은 순서를 모르니까 모른다. 잘 굴러간 공연은 원래 티가 안 난다.


나만 안다.


8년 동안 그 맛으로 했다.


이 얘기를 적어두는 이유가 그거다.


지금은 그 맛이 없다.



3번과 4번


이번 공연은 지난달에 올라갔다.


2인극이고 러닝타임 90분이다.


큐가 백여든일곱 개다.


초반부에 3번 큐와 4번 큐가 있다.


3번은 조명이다. 무대 오른쪽에 핀이 들어온다.


4번은 음향이다. 빗소리가 깔린다.


순서가 중요하다. 조명이 먼저 들어오고 그다음에 비가 와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먼저 보이고 상황이 뒤에 붙는다.


연출이 그렇게 만들었다. 연습 때 몇 번을 고쳤다.


12회차 때 뒤집혔다.


빗소리가 먼저 나고 조명이 들어왔다.


나는 부스에서 소리를 질렀다.


정확히는 소리를 안 질렀다. 공연 중이니까 못 지른다. 인터컴에 대고 뭐 하는 거냐고 했다.


음향 오퍼레이터가 이랬다.


네 큐대로 했는데요.


내 큐시트를 봤다.


4번이 조명이고 3번이 음향이었다.


바뀌어 있었다.


그날 공연은 그대로 끝났다.


관객은 아무도 몰랐다. 알 리가 없다. 그 사람들은 처음 보는 거니까.


배우도 몰랐다. 배우는 조명이랑 음향 순서를 신경 안 쓴다.


오퍼레이터 둘은 큐시트대로 했으니까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을 안 한다.


나만 알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에 내가 틀렸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게 제일 쉬운 결론이니까 그렇게 했다.



종이


내 큐시트는 종이다.


요즘은 태블릿 쓰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종이가 편하다. 손으로 고치는 게 빠르다.


A4로 열두 장이다. 클립으로 묶어서 부스에 놓는다.


공연 끝나고 그 장을 다시 봤다.


3번이 음향이고 4번이 조명이다.


내 글씨다.


고친 자국이 없다.


나는 큐시트를 고칠 때 볼펜으로 긋고 위에 다시 쓴다. 지우개는 안 쓴다. 지우면 뭘 고쳤는지 모르니까 안 쓴다.


8년 동안 그렇게 했다.


그은 자국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적혀 있던 것처럼 되어 있었다.


집에 백업이 있다. 파일로 만들어놓은 게 있다.


열어봤다.


파일에도 3번이 음향이었다.


파일 수정 날짜는 두 달 전이다. 초연 전이다.


그 뒤로 안 건드렸다.



연출


연출한테 전화했다.


이 사람은 나랑 5년 같이 일했다. 성격이 더럽지만 기억력은 좋다.


3번 4번 순서 바뀐 거 아느냐고 물었다.


연출이 뭐가 바뀌었냐고 했다.


조명 먼저였잖아요 했다.


연출이 이랬다.


아닌데. 비 먼저인데.


연습 때 그거 세 번 고쳤잖아요 했다.


연출이 이랬다.


고치긴 고쳤지. 근데 결국 비 먼저로 갔잖아.


나는 그때 좀 화가 났다.


이 사람이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싶어서 화가 났다.


그래서 연습 영상 얘기를 꺼냈다.


우리는 연습을 찍어놓는다. 나중에 확인할 일이 많아서 찍는다.


연출이 보내달라고 했다.



영상


연습 영상을 열었다.


그 장면 찾는 데 오래 안 걸렸다. 초반부니까 앞쪽에 있다.


봤다.


빗소리가 먼저 나고 조명이 들어왔다.


나는 그 영상을 세 번 돌려봤다.


세 번 다 그랬다.


내 기억이 틀린 것이다.


이렇게 쓰면 얘기가 끝난 것 같은데 안 끝났다.


그 영상에서 내 목소리가 들린다. 연습 때 내가 콜을 하니까 들린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


큐 삼 고.


그러고 빗소리가 난다.


그다음에 내가 이렇게 말한다.


큐 사 고.


그러고 조명이 들어온다.


맞다.


영상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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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견 탱고의 눈으로 길을 보고, 시각장애인 연구자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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