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계시던 분

by김경훈

[메모]


회사 · 중소기업

직무 · 기획

근속 · 4년

자리 · 창가 두 번째

문제 · 컵 한 개

상태 · 퇴사 예정



탕비실


우리 회사 탕비실은 좁아요.


성인 셋 들어가면 꽉 차는데 사람은 마흔 명이 넘어요. 그러니까 점심시간 지나면 거기가 전쟁이에요.


싱크대 있고 정수기 있고 전자레인지 있고 그 위에 선반이 있어요.


선반에 컵이 놓여 있어요.


다들 자기 컵을 갖다 놔요. 이름 써 붙인 사람도 있고 안 써도 다들 아는 컵도 있고요.


저는 파란색 텀블러 써요. 입사할 때 산 거예요. 4년 썼는데 아직 멀쩡해요.


컵이 대충 스무 개쯤 있어요.


그중에 하나가 좀 그래요.


흰색 머그컵인데 손잡이가 있고 별거 없어요. 어디서나 파는 거예요. 로고 같은 것도 없고요.


근데 그게 좀 그래요.


좀 그렇다는 말을 두 번 썼는데 달리 쓸 말이 없어요.


이상하다고 하기에는 이상한 데가 없거든요.


그냥 컵이에요.


컵이 이상하다고 하면 저만 이상한 사람 되잖아요.


그래서 4년 동안 아무한테도 제대로 말 안 했어요.


지금 이거 쓰는 것도 좀 그래요.



그 컵


제가 입사 첫 주에 그걸 봤어요.


새로 들어가면 컵 놓을 자리를 찾잖아요. 어디가 비었나 보다가 그 컵 옆이 비었길래 거기 놨어요.


그날 사수가 지나가면서 그러더라고요.


거기 말고 저쪽에 놔.


왜요 했더니.


그냥 저쪽이 편해.


그때는 아 자리 텃세인가 했어요. 어디나 그런 거 있잖아요.


그래서 옮겼어요.


한 달쯤 지나서 알았는데 그 컵 주변은 늘 비어 있어요.


양옆으로 컵 하나씩 들어갈 자리가 비어요.


아무도 안 놔요.


선반이 좁아서 자리 없다고 다들 그러는데 거기는 비어 있어요.



누구 거예요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사수한테 물었어요. 저 컵 누구 거예요.


사수가 이러더라고요.


전에 계시던 분 거야.


누구요 했더니.


내 앞에 있던 사람.


그분 지금 어디 계세요 했더니 잘 모른대요. 그만둔 지 오래됐다고.


그래서 저는 아 그렇구나 했어요.


회사에 그런 물건 하나쯤 있잖아요. 아무도 안 치우는 거.


근데 한 달쯤 뒤에 다른 선배한테 또 물어봤어요. 술 마시다가 물어봤어요.


그 선배가 이러는 거예요.


그거 전에 계시던 분 거야.


똑같은 말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누구냐고 했더니 그 선배가 제 사수 이름을 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 이름을 댔어요.


제가 사수는 다른 사람이라던데요 했더니.


그 선배가 그러면 그 사람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어요.



다 물어봤어요


이게 좀 웃긴데 저는 그때부터 이걸 취미처럼 물어보고 다녔어요.


회식 때마다 물어봤어요.


저 컵 누구 거예요.


열몇 명한테 물어봤는데 대답이 다 똑같아요.


전에 계시던 분 거요.


그런데 그 전에 계시던 분이 누구냐고 하면 다 달라요.


제일 오래 다닌 분이 부장님인데 12년 되셨어요.


부장님한테도 물어봤어요.


부장님이 이러시더라고요.


내가 왔을 때부터 있었어.


부장님 오시기 전에 계시던 분 거냐고 여쭤봤어요.


부장님이 그렇겠지 하시더니 좀 있다가 이러셨어요.


근데 그때 물어보니까 그때도 그렇게 대답하던데.


그러니까 12년 전에도 전에 계시던 분 거였다는 거예요.


우리 회사 설립이 19년 됐어요.



사수


제 사수가 재작년에 그만뒀어요.


나가는 날 술을 마셨어요. 둘이서요.


그때 제가 취해서 그 컵 얘기를 꺼냈어요.


형 그 컵 진짜 누구 거예요.


사수가 웃더라고요.


너 아직도 그거야.


네 아직도요 했어요.


사수가 잔을 놓더니 이러더라고요.


나도 처음에 그거 물어보고 다녔어.


몇 년이나요 했어요.


한 2년.


그러다 왜 그만뒀냐고 했어요.


사수가 이렇게 말했어요.


물어보면 답이 오잖아.


무슨 뜻이냐고 했어요.


물어보면 다들 전에 계시던 분 거라고 하잖아. 근데 그 사람들이 다 다른 사람 이름을 대잖아.


네 했어요.


사수가 이러더라고요.


그 이름들 다 적어봤거든.


몇 개나 되냐고 했어요.


열일곱 개.


그중에 실제로 있던 사람이 몇이냐고 했어요.


사수가 술을 마시고 이렇게 말했어요.


없어. 하나도.


저는 그때 그게 무슨 소린지 잘 못 알아들었어요.


취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지금은 알아요.



안 쓰는데


아무도 안 써요.


이건 확실해요. 4년 동안 누가 그 컵 쓰는 거 한 번도 못 봤어요.


근데 늘 젖어 있어요.


정확히는 안쪽이 젖어 있어요. 물기가 좀 남아 있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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