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단계

by김경훈

[메모]


직업 · 회의 통역

경력 · 15년

언어 · 한국어와 영어

가족 · 배우자 딸 하나

기록 시작 · 작년 10월

분류 · 개인용



어체


내 직업은 말의 온도를 옮기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거창하게 들리는데 실제로 하는 일이 그렇다.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다고들 하지만 없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있다. 조동사를 바꾸고 문장을 길게 늘이고 직접적인 요구를 우회한다.


그걸 한국어로 옮길 때 나는 어느 층위로 놓을지를 정해야 한다.


같은 문장을 하십시오로 놓을 수도 있고 하세요로 놓을 수도 있고 해요로 놓을 수도 있다. 셋 다 존댓말인데 거리가 다르다.


그 거리를 정하는 게 내 일이다.


15년 하면 그게 반사가 된다. 회의실에 들어가서 앉은 사람들 나이와 직급과 서로 부르는 방식을 3분쯤 보면 그날 쓸 층위가 정해진다.


이게 이 이야기와 무슨 상관이냐 하면 상관이 있다.


나는 남들이 못 잡는 걸 잡는 사람이다.


이건 자랑이 아니라 직업병에 가깝다.


가족들은 내가 말꼬리를 잡는다고 한다. 남편은 결혼하고 몇 년 동안 그것 때문에 힘들어했다. 자기는 아무 뜻 없이 한 말인데 내가 자꾸 층위를 읽는다고 했다.


나는 안 읽으려고 해도 읽힌다고 대답했다.


그건 사실이다.


읽고 나서 말을 안 할 수는 있어도 안 읽을 수는 없다.


그래서 작년 10월에 알아챘다.



남편


작년 10월 어느 날 남편이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이거 어디다 둘까요.


그냥 리모컨을 어디 두느냐고 물은 것이다. 별말이 아니다.


우리는 결혼한 지 12년 됐고 연애까지 하면 16년이다. 서로 반말을 한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날 요를 붙였다.


이거 어디다 둘까요.


이 문장에서 요 하나가 붙었을 뿐이다. 어디다 둘까 하면 될 것을 어디다 둘까요 했다.


나는 그때 아무 말도 안 했다. 사람이 가끔 그럴 수 있다. 통화하다가 말투가 남아서 그럴 수도 있고 장난일 수도 있다.


실제로 남편은 회사에서 하루 종일 존댓말을 쓴다. 집에 와서 그게 남는 일이 있었다. 결혼 초에 몇 번 있었고 그때는 둘 다 웃었다.


그날은 안 웃었다.


남편이 웃지 않았다는 뜻이다. 자기가 그렇게 말한 걸 몰랐으니까 웃을 일이 없었다.


그다음 날은 아니었다.


일주일쯤 지나서 또 그랬다.


두 주쯤 지나서 또 그랬다.


빈도가 늘었다.


나는 세지 않았다. 세면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안 셌다.


그런데 안 세도 안다. 이게 내 직업이다.


12월쯤에는 절반쯤 그랬다.


지금은 거의 그런다.


남편은 나한테 요를 붙여 말한다.


반말을 안 하는 게 아니다. 반말도 한다. 그런데 문장이 짧아지면 반말이고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요가 붙는다.


이건 사람이 잘 모르는 사람한테 말할 때 나오는 패턴이다.


짧은 건 놔두고 긴 건 격식을 챙긴다.


나는 이 패턴을 15년 동안 남의 대화에서 봐왔다.


내 집 식탁에서 볼 줄은 몰랐다.



물어봤을 때


12월에 물어봤다.


자기 요즘 나한테 존댓말 하는 거 알아.


남편이 무슨 소리냐고 했다.


방금도 했잖아.


남편이 자기가 언제 그랬냐고 했다.


나는 아까 한 말을 그대로 옮겨줬다.


남편이 잠깐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건 그냥 말버릇이지.


말버릇은 원래 있던 거다. 없던 게 생기면 그건 말버릇이 아니다.


이 말을 하려다가 안 했다.


싸움이 될 것 같아서 안 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무서워서 안 했다.


싸움이 무서운 게 아니라 남편이 정말 모른다는 게 무서웠다.



정민이


정민이는 대학 때부터 친구다.


이 애하고 나는 서로 욕을 한다. 이십몇 년 그랬다.


작년 11월에 만났는데 안 했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이건 이상한 문장이 아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하는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안 한다.


우리가 만나면 앉자마자 야 너 살쪘냐부터 시작한다. 20년 그랬다.


그날은 안 그랬다.


밥을 먹는 내내 예의가 있었다.


정민이가 내 잔에 물을 따라줬다.


그런 걸 해준 적이 없다.


헤어질 때 정민이가 이렇게 말했다.


조심히 들어가.


이 말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원래 헤어질 때 그냥 간다. 손도 안 흔든다.


그날은 흔들었다.


집에 오면서 나는 계속 그 장면을 다시 봤다. 통역할 때 하는 방식으로 봤다. 문장을 하나씩 떼어서 층위를 매겨봤다.


한 단계씩 올라가 있었다.


전부 한 단계씩이다.


며칠 뒤에 정민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야 너 나한테 왜 그래.


정민이가 뭐가 하고 물었다.


지난번에 물 따라주고 손 흔들고 그랬잖아.


정민이가 웃었다.


그게 왜.


너 나한테 그런 거 안 하잖아.


정민이가 잠깐 조용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안 그랬나.


안 그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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