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어

by김경훈

[기록]


전직 · 국어사전 편찬

재직 · 31년

퇴직 · 6년 전

지금 · 개정판 자문

쓰는 사람 · 예순여덟

분류 · 사적인 것



그 말


내가 아는 말이 하나 있다.


이 글에 그 말을 적지는 않겠다. 이유는 뒤에 쓰겠다.


우선 이것부터 말해두어야겠다. 나는 사전 만드는 일을 31년 했다. 표제어를 세우고 뜻을 풀고 용례를 붙이는 일이다.


우리 일을 사람들은 낭만적으로 본다. 말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말을 모으는 줄 안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실제로는 지루한 일이다. 하루 종일 카드를 정리하고 용례를 세고 이 말이 표제어가 될 만큼 쓰이는지를 다툰다. 회의가 길고 사람들이 고집이 세다.


그래도 31년 했다. 나는 이 일이 좋았다.


이 일을 하면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


사람은 자기가 쓰는 말을 다 알지 못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다. 말은 몸에 붙어 있어서 쓰는 사람은 그것이 표준인지 방언인지 옛말인지 자기가 만든 말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남이 못 알아들어야 비로소 안다.


나는 그 말이 그런 경우인 줄 알았다.



언제 알았나


4년 전이다.


손자를 데리고 산에 갔다가 그 말을 썼다.


손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아이가 모르는 말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설명을 해주려고 입을 열었다.


안 나왔다.


말이 안 나온 것이 아니라 설명이 안 나왔다. 나는 그런 적이 없는 사람이다. 31년 동안 말 뜻을 푸는 일로 밥을 먹었다.


손자가 기다렸다.


내가 이렇게 말했다.


크면 알게 된다.


이건 아이한테 하면 안 되는 말이다. 나는 우리 애들 키울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손자가 그러냐고 하고 뛰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 좀 서 있었다.


집에 와서 사전을 폈다.


내가 만든 사전이다. 표제어가 오십만이 넘는다.


없었다.


이것도 그때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오십만이 많아 보여도 우리말 전부는 아니다. 방언과 옛말과 전문어를 다 담지는 못한다.


그래서 다른 사전을 봤다.


큰사전을 봤고 옛말사전을 봤고 방언사전을 봤다.


없었다.


여기서부터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방언사전에 없다는 것은 조사가 안 된 지역 말이거나 아예 방언이 아니라는 뜻이다.


옛말사전에 없다는 것은 문헌에 안 나온다는 뜻이다.


문헌에 안 나오고 조사도 안 된 말을 내가 쓰고 있다.



검색


요즘은 좋은 세상이다.


옛 문헌을 데이터로 만들어놓은 것이 있다. 15세기 것부터 근대 것까지 검색이 된다.


넣어봤다.


결과 없음이 나왔다.


신문 데이터베이스도 봤다. 1920년대 것부터 있다.


없었다.


인터넷 전체를 검색해봤다. 이것은 학술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요즘 말이 있는지 보려면 이만한 것이 없다.


없었다.


이쯤 되면 내가 만든 말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사람이 어릴 때 말을 잘못 배워서 평생 쓰는 경우가 있다. 흔하다. 우리 일 하는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사례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어릴 때부터 썼다.


그리고 어릴 때 그 말을 쓰면 어른들이 알아들었다.



형님


형님이 살아 계셨다.


작년 봄에 돌아가셨는데 그때는 계셨다.


전화를 걸어서 물었다.


형님 이 말 기억나십니까.


형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럼 기억나지.


나는 그 자리에서 좀 안심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이거 우리 집에서만 쓰던 말입니까.


형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슨 말 말이냐.


방금 하신 말씀 아니냐고 했다.


형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을 다시 했다.


형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럼 기억나지.


같은 대답이었다.


그래서 세 번째로 물었다.


형님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형님이 한참 조용하셨다.


그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왜 그런 걸 묻냐.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종이에 이렇게 적었다.


대화 중에는 통한다.


대화가 끝나면 없다.


형님은 작년 봄에 가셨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병실에 갔다.


말씀을 잘 못 하셨다.


내가 손을 잡고 있었다.


형님이 뭐라고 하셨는데 잘 안 들렸다.


귀를 가까이 댔다.


그 말이었다.


내가 형님 무슨 뜻이냐고 여쭈었다.


형님이 나를 보셨다.


그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도 알잖아.


그게 마지막 말씀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뒤에도 며칠 계셨는데 말씀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나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너도 알잖아.


이 문장은 두 가지로 읽힌다.


너도 그 뜻을 알지 않느냐로 읽을 수도 있고 너한테도 있지 않느냐로 읽을 수도 있다.


형님은 국어 하시는 분이 아니었다. 그런 구별을 하고 말씀하셨을 리가 없다.


나는 그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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